항목 ID | GC081003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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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章山郡 |
영어공식명칭 | Jangsan-gun |
이칭/별칭 | 옥산(玉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위은숙 |
[정의]
940년경부터 1308년까지 경상북도 경산시 일대에 설치되었던 고려 시대의 지방 행정 구역.
[개설]
장산군(章山郡)은 원래 통일 신라 시대 때 장산군(獐山郡)이 940년(태조 23)에 변경된 것이다.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압량읍과 동 지역 일부, 대구광역시 수성구 일부를 관할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신라왕조의 멸망과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신라의 지방 제도는 해체되었다. 따라서 고려 태조는 후삼국 통일 후 지방 호족들의 기여도나, 새롭게 확보한 지역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지방 사회를 재편하였다. 그 과정에서 940년경 장산군(獐山郡)을 장산군(章山郡)으로 개칭하였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 권57 지리지의 장산군(章山郡)조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권150 경산현(慶山顯) 편 등에 장산군의 연혁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고려사』 권57 지리지 장산군조에는 “장산군은 본래 압량소국(押梁小國)[압독(押督)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지미왕(祗味王) 때 차지하여 군(郡)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때 장산군(獐山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현종 9년(1018) [경주에] 내속(來屬)하였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자, 왕의 이름을 피하여 경산(慶山)으로 고쳤다. 충숙왕 4년(1317)에 국사(國師) 일연(一然)의 고향이므로, 승격시켜 현령관(縣令官)이 되었다.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왕비(王妃) 노씨(盧氏)의 고향이라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 별호(別號)는 옥산(玉山)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장산군(獐山郡)을 장산군(章山郡)으로 바꾼 시기는 고려 초로 나오지만, 940년 3월 고려 정부가 여러 주·부·군·현의 칭호를 고쳤다고 하는 기록이 있어, 고려 초는 바로 940년으로 추정된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4 지리지1 신라조에서는 장산군(獐山郡)의 영현(領縣)에 대하여 “영현은 셋이다. 해안현(解顔縣)은 본래 치성화현(雉省火縣)[한편 미리(美里)라고도 이른다]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여량현(餘糧縣)은 본래 마진양현(麻[미(彌)라고도 쓴다]珍良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의 구사부곡(仇史部曲)이다. 자인현(慈仁縣)은 본래 노사화현(奴斯火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고려 초 장산군은 해안현·자인현·구사부곡을 영현으로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장산군(章山郡)은 1018년(현종 9) 고려 지방제도가 주·속현 체제로 확립될 때 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 경주(慶州)의 속군이 되었다. 이때 영현이었던 해안현·자인현·구사부곡도 이속된 것으로 보인다. 1172년(명종 2) 처음으로 감무가 파견되었다. 하지만 1308년(충선왕 복위 1) 충선왕이 복위하면서 장산군의 ‘장’이 충선왕의 이름인 장(璋)과 발음이 같다하여, ‘경산’으로 개칭하였다.
[의의와 평가]
장산군(章山郡)의 존재는 인적 연고에 따라 읍명 및 읍격이 변화하던 중세 지방행정 제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