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군[獐山郡]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380
한자 獐山郡
영어공식명칭 Jangsan-gun
이칭/별칭 압량소국,장산군(章山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방용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757년연표보기 - 압량군(押梁郡)을 장산군(獐山郡)으로 개칭
개정 시기/일시 940년 - 장산군(獐山郡)을 장산군(章山郡)으로 개칭

[정의]

757년부터 고려 전기까지 경상북도 경산시 일대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

[개설]

장산군(獐山郡)은 원래 압량군(押梁郡) 또는 압독군(押督郡)으로 불리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 지미왕(祗味王)[재위 112~134]이 압량소국(押梁小國)[혹은 압독소국(押督小國)]을 정벌하였고, 이후 군(郡)을 설치했다고 한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경덕왕이 장산군으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동 지역과 남산면, 압량읍 및 대구광역시 동구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757년(경덕왕 16) 군현제를 강화하고, 전국의 지명을 한자식으로 고쳐 쓰는 과정에서 압량군(押梁郡)[혹은 압독군(押督郡)]을 장산군(獐山郡)으로 바꾸었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 권34 지리지1 신라조에는 “지미왕 때 압량소국[혹 압독소국]을 쳐 빼앗아 군을 설치하였다. 경덕왕이 [장산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고려] 장산군(章山郡)으로 영현(領縣)은 셋이다. 해안현(解顔縣)은 본래 치성화현(雉省火縣)[한편 미리(美里)라고도 이른다]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여량현(餘糧縣)은 본래 마진양현(麻[미(彌)라고도 쓴다]珍良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의 구사부곡(仇史部曲)이다. 자인현(慈仁縣)은 본래 노사화현(奴斯火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의 군(郡)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권32 제사지1 중사(中祀)조에는 오악(五岳)을 설명하면서 “중앙의 부악(父岳)은 공산(公山)이라고도 하는데, 압독군(押督郡)이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 의해편 「원효불기(元曉不羈)」에는 원효의 출생 배경을 설명하는 중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押梁郡) 남쪽, 지금[고려]의 장산군(章山郡)인데, 불지촌(佛地村) 북쪽 밤나무골 사라수 아래에서 태어났다”라는 기사가 남아있다.

[내용]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2세기 초반 지미왕이 정벌하여 신라에 병합했다고 한다. 다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3년(102) 8월에 압독국이 항복해왔다는 기사도 보여 신라에 편입되었던 정확한 시점은 알기 어렵다.

757년 비로소 장산군이 되었으며, 해안현·여량현·자인현 세 곳을 영현으로 두었다. 『삼국사기』에는 218년(나해이사금 23)에 백제군이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자,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이 직접 반격에 나섰다거나 656년(태종무열왕 3)에 김인문(金仁問)이 당에서 귀국하자 압독주(押督州) 총관(摠管)으로 제수하고 장산성(獐山城)[지금의 용산산성(龍山山城)으로 비정]을 쌓도록 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장산군’이라는 지명이 장산(獐山) 혹은 장산성(獐山城)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삼국시대 초기부터 줄곧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었음을 시사한다.

[변천]

고려(高麗) 초기에 장산군(章山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018년(현종 9)에 경주(慶州)에 속하였으며,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1308년 충선왕(忠宣王)이 복위하자, 왕의 이름인 ‘장(璋)’을 피하여 장산에서 경산(慶山)으로 개칭하였다.

[의의와 평가]

장산군[獐山郡]은 신라 및 통일 신라 시대의 지방지배 방식과 군사적 요충지 관리 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주목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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