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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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神社參拜反對運動 |
이칭/별칭 | 경산14인항일사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산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이 전개한 신사참배반대운동.
[개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 그리고 1942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 전시체제기에 일제는 한국 교회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다. 이에 조선예수교장로회(朝鮮耶蘇敎長老會)는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수용하였고, 그 결과 대부분의 교회들은 신사 참배의 예식을 거행해야만 했다. 1941년 경산 지역에서도 이명석 목사가 주동하여 주일 예배 시작에 앞서 ‘1. 국기 향배, 2. 국가 합창, 3. 궁성 요배, 4. 황국신민서사, 5. 황군무운장구기도’ 등의 의식을 강행하였다.
[역사적 배경]
1941년 경산군 진량면[현 경산시 진량읍]에 있는 평사교회(平沙敎會), 상림교회(上林敎會), 봉회교회(鳳會敎會)[지금의 진량제일교회]의 지도자들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성경(聖經) 구절을 앞세워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 등 교회 탄압에 저항하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 경찰의 사찰과 관심이 점점 가중되어 갔다.
[경과]
일본 경찰은 1943년 6월 18일 하양읍에 거주하고 있던 진량면 봉회교회 장로 김종철의 집을 수색하였다. 누군가 사상범으로 고발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진량면에 소재한 평사교회, 상림교회, 봉회교회 등에서 시무하고 있던 강만조(康萬祚)[강전조(康田祚)] 장로의 설교 내용을 적은 필기장이 압수되었다. 강만조 장로가 봉회교회를 비롯해 상림교회와 평사교회에서 1942년 1월경부터 1943년 6월경까지 출애굽기(出埃及記) 20장을 가지고 ‘민족주의자 모세를 본받자’란 제목의 설교와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여 우리나라도 곧 독립이 된다는 항일적 설교를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조천기도회 강령’이란 제목 아래에 ‘조선독립만세·일본타도·영미만세·비밀엄수’ 등의 글을 써놓기도 했다. 이로 말미암아 세 교회의 목사·전도사·장로·집사 등 지도자 14명이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및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이른바 ‘경산14인항일사건’이다.
세 교회를 시무하며 항일적인 설교를 했던 장로 강만조를 비롯하여 상림교회의 장로 현상유(玄相裕), 집사 현종후(玄鍾厚)·김종만(金鍾萬)·이종호(李鍾昊), 평사교회의 장로 김종호(金鍾鎬), 집사 현준이(玄俊伊)·조달용(曺達用)·유한곤(兪漢坤)·김선수(金善壽), 봉회교회의 장로 김종철(金鍾哲)·안치준(安致準), 집사 안치대(安致大), 전도사 손우헌(孫佑憲) 등 14인이 체포되었다.
[결과]
1943년 6월 18일 신사참배반대운동에 관련된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경산경찰서 유치장에서 취조를 받은 후 1944년 6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및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이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같은 해 11월 11일 출옥하였다. 한편, 진량면 소재의 평사교회, 상림교회, 봉회교회는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전시체제 하에서 경산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이 항일적인 설교를 통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