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7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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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達潤 |
영어공식명칭 | Kim Daryun |
이칭/별칭 | 김영윤(金榮潤),김달윤(金達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902년 7월 9일 - 김달윤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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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8일 - 김달윤 대구 서문시장 만세운동 참여 |
수학 시기/일시 | 1919년 - 김달윤 계성학교 8회 졸업 |
몰년 시기/일시 | 1949년 7월 8일 - 김달윤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8년 - 김달윤 대통령 표창 추서 |
출생지 | 김달윤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시천리 8 |
학교|수학지 | 김달윤 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
활동지 | 김달윤 활동지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달윤(金達潤)[1902~1949]은 1919년 3월 8일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교우들과 함께 대구 서문시장에서 열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가계]
김달윤(金達潤)은 1902년 경상북도 하양군(河陽郡) 와촌면(瓦村面) 시천동(匙川洞)[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시촌리]에서 출생하였다. 다른 이름은 김영윤(金榮潤)·김달윤(金達允)이다. 아버지 김영수(金永壽)는 경산 지역 개신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며 농업에 종사했다.
[활동 사항]
김달윤은 계성학교 5학년에 재학 중 대구 서문시장에서 열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2월 중국 상하이에서 김순애(金順愛)가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白南埰)를 찾아와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고, 2월 24일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이 대구에 내려와 이만집(李萬集)·백남채·김태련(金兌鍊) 등 기독교계 인사들에게 궐기를 요청하자 대구 지역 개신교계 지도급 인사들은 계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성경학교(聖經學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1919년 3월 8일 대구 큰장[서문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김달윤은 당시 계성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3월 8일 토요일 정상 수업을 마친 뒤 계성학교의 학생 동원을 담당한 교사 최상원(崔相元)의 지시로 평상시처럼 귀가하는 척 하면서, 기숙사에 들러 학모를 바꾸어 쓰고 동산병원이 있는 동산[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일원] 숲 속을 지나 큰장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계성학교 학생 40여 명과 성경학교 학생 20여 명, 신명여학교 학생 일부도 시장 근처에서 궐기 시간을 기다렸다. 오후 3시경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200여 명이 돌진해오자, 학생들이 일제히 달려 나와 제지하려는 헌병들을 격퇴하고 시장으로 들어갔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태극기가 배포되면서 학생시위대가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학생과 군경은 길거리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벌어졌고 그 사이 시장 군중들이 합류해 시위대열은 약 1,000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열이 종로를 지나 달성군청[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 대구백화점 부근] 가까이 이르자 대구 주재 일본군 제80연대 보병들이 출동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만세시위를 계속하려는 시위대열을 일본 군경이 진압하자 시위 군중은 많은 부상자와 체포자를 내면서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달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달윤은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김달윤은 200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