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420
한자 三一運動
영어공식명칭 March 1st Movement
이칭/별칭 기미독립운동,삼일운동,3·1 만세 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 - 3·1운동 발생
성격 독립운동

[정의]

1919년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서 일제 식민통치에 대항하여 일어난 독립운동.

[개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부터 5월경까지 한국의 자주독립과 한국민의 자유 평화를 쟁취하려는 목적으로 국내외의 전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이었다. 경상북도에서는 1919년 3월 8일 대구부(大邱府) 큰장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도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경산(慶山)에서는 대구 사립계성학교(私立啓聖學校) 출신 전덕수(全德洙), 경산 삼북동 교회 목사 서성오(徐聖五) 등이 1919년 3월 11일 경산읍장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기밀이 누설되면서 좌절되었다.

[역사적 배경]

1910년 8월 국권피탈 이후 국내에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설치되었다. 일본에서 파견된 총독(總督)은 국내의 입법·사법·행정 전권을 행사하였다. 이를 위해 총독은 헌병경찰제도를 두고 그들로 하여금 한국인을 감시하고 탄압하였다. 1914년 당시 경상북도민 약 185만 명은 68개 헌병기구와 78개 경찰기구에 배치된 1,000여 명의 헌병경찰에 의해 철저한 감시와 탄압을 받아야 했다.

따라서 일제의 강점 이전부터 전개되어 오던 국권회복운동도 일단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국외에서는 1919년 1월 미국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였고, 일본 동경(東京) 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을 외쳤다. 또 안으로는 이완용(李完用)의 고종 독살설이 유포되어 국민들이 격분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조건이 곧 경산을 비롯한 전국적 3·1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경과]

1919년 3·1운동은 3월 1일 서울과 평양 등에서 비롯되어 전국 각지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3·1운동은 서울과 각 지방에서 종교조직은 종교조직대로 학생조직은 학생조직대로, 또 양반층은 양반들대로 활발하게 움직여 1919년 3월부터 1919년 5월경까지 약 3개월 동안 전국 8도 223개 군 가운데서 221개 군에서 전개되었다.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1919년 3월 8일 대구만세운동에서부터 1919년 5월 7일 청도군 매전면 구촌동 만세운동에 이르기까지 약 두 달간 80여 곳에서 90여 회나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8일 대구부 큰장[서문시장]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경상북도 전역으로 파급되어 3월 16일 이후로는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경상북도 도내 3·1운동은 3월 27일경에 정점을 이루다가 5월 초에 종식되었다.

경상북도는 23개 군 가운데서 경산군과 군위군을 제외한 21개 군에서 일어났다. 경산군과 군위군에서는 만세 시위 운동이 계획 및 준비되었으나, 기밀 누설 등으로 일본 경찰에게 사전 발각되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경산에서는 대구 사립계성학교 출신 전덕수가 3·1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검거되었다. 경산군 경산면(慶山面) 중방동(中方洞)[현 경산시 중방동] 출신인 전덕수는 3월 7일 경산면 삼북동(三北洞)[현 경산시 삼북동]의 교회 목사 서성오와 함께,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崔相元)을 찾아가서 만세운동에 대해 논의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서성오와 함께 3월 11일 경산읍 장날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으나 기밀이 누설되면서 계획을 중단하였다.

한편 경산 출신으로 다른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경우는 종종 있었다. 경산 용성(龍城) 출신 백남채(白南採)와 경산 안심(安心) 출신 최경학(崔敬學), 경산 고산(孤山) 출신 김무생(金武生) 등은 1919년 3월 8일 대구 큰장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경산 고산 출신 목사 김기원(金基源)은 경주 지역 목사 박래영(朴來英)과 교회 간부들을 권고하여 1919년 3월 15일 경주 지역 만세운동을 촉발케 하였다. 또 경산 진량(珍良) 출신 김성욱(金聲旭)은 1919년 3월 18일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읍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결과]

3·1운동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경상북도에서는 1919년 3월 8일부터 1919년 5월 7일까지 두 달 동안 90여 회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 2,100여 명이나 체포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경산군3·1운동은 준비하는 과정에서 관련 인물들이 검속되어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3·1운동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지만, 일제가 야만적인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전환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선포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비록 경산군에서는 만세운동이 직접적으로 일어나지 못하였으나, 지역 내 독립 의식을 크게 고취시켰고, 이는 1920년대 활발한 대중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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