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7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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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武生 |
영어공식명칭 | Kim Musae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무생(金武生)[1898~1971]은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 재학생으로 1919년 3월 8일 대구 큰장[서문시장]에서 열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가계]
김무생은 1898년 경상북도 경산군 고산면(孤山面) 사월동(沙月洞)[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사월동]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김무생은 1919년 3월 대구의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의 숭실학교에 진학한 상황이었다. 대구에서 만세운동이 계획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김무생은 3월 6일 오전 평양에서 대구로 향하였다. 서울을 거쳐 3월 7일에는 김천에서 개신교 전도원 박제원(朴齊元)과 동행하였고, 대구에 도착해서는 신명여학교에 들려 교직원 임봉선(林鳳善)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무생은 서울과 평양의 만세운동 때 보여 준 여학생들의 활약상을 전하며, 신명여학교 학생들의 적극 참여를 권유하였다. 이어 대남여관(大南旅館)에 투숙하면서, 이곳에 숙식하고 있던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崔相元)과 만세운동을 협의하는 한편, 여관 주인 아들인 대구고등보통학교 4학년 학생 허범(許範)을 만나 대구고등보통학교의 참여도 권유하였다. 허범은 이에 동의하고 이튿날 급장 신현욱(申鉉旭)과 의논하여 3학년 대표 백기만(白基萬), 2학년 대표 하윤실(河允實), 1학년 대표 김수천(金洙千) 등을 통하여 전교생을 동원하게 되었다.
3월 8일 오후 1시경부터 계성·신명·성경학교 학생 등이 서문시장으로 숨어들어 대기하였다. 오후 3시경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200여 명이 시장 안으로 진입하자, 김무생도 서문시장으로 들어갔다. 각지에서 몰려온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 경찰과 기마대의 제지를 물리치고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대구경찰서 앞의 저지선을 뚫고 종로를 지나 동성로를 거쳐 달성군청(達城郡廳) 근처에 이르자 기관총으로 무장한 대구 주재 일본군 제80연대 보병들이 출동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만세시위를 계속하려는 시위대열은 일본 군경의 진압으로 많은 부상자와 체포자를 내면서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무생이 체포되었다. 김무생은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김무생은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