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8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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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蟾津江-崔淑珉- |
영어의미역 | Seomjingang River by Choe Sukmi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석기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8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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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905년 |
배경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
성격 | 한시|칠언 고시|서정시 |
작가 | 최숙민(崔琡民)[1837~1905] |
[정의]
개항기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에 살던 최숙민이 하동 섬진강을 유람하면서 지은 한시.
[개설]
「섬진강(蟾津江)」은 구한말 유학자 최숙민(崔琡民)[1837~1905]의 문집 『계남집(溪南集)』 권1에 수록되어 있다. 「섬진강」은 최숙민이 노년에 강회에 초청되어 학문을 강론한 뒤, 섬진강을 유람할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동의 쌍계사(雙磎寺)와 화개동에 남아 있는 최치원(崔致遠)[857~915]의 유적과 섬진강 가 삽암(鈒巖)에 깃든 고려 말 은자 한유한(韓惟漢), 지리산[1,915m]을 유람하고 섬진강에서 배를 타고 내려가며 인지지락(仁智之樂)을 만끽한 정여창(鄭汝昌)[1450~1504], 배를 타고 새벽에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간 조식(曺植)[1501~1572] 등 역사적 선현들을 회상하는 한편,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회한을 노래하고 있다.
최숙민의 자는 원칙(元則), 호는 계남(溪南)·존와(存窩),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현 하동군 옥종면과 북천면 지역에서 살았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전라남도 장성에서 강학하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을 찾아가 사사한 뒤, 스승의 학설을 따라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였다. 동문 조성가(趙性家), 정재규(鄭載圭)와 함께 경상우도 삼가·단성·옥종 등지에 노사학을 전파시킨 주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구성]
36구로 구성된 칠언 고시이다. 처음에 섬진강의 정경을 묘사하였고, 그 다음에는 최치원, 한유한, 정여창, 조식 등의 선현들을 회상하였고, 그 다음에는 자신이 어떤 뜻을 세우고 살았는지를 회고하는 내용을 표현하였으며, 마지막에서는 삶의 끝자락에 있는 자신의 심경을 노래하고 있다.
[내용]
섬진지수주천리(蟾津之水注千里)[섬진강의 강물은 천리나 흘러내리는데]
방장백운교작문(方丈白雲交作門)[방장산과 백운산 교대로 문이 되었네]
절처묘경범기곡(絶處妙境凡幾曲)[빼어난 곳과 묘한 경치 모두 몇 굽이던가]
금사옥력양록문(金沙玉礫漾綠紋)[금빛 모래 옥빛 자갈에 출렁이는 푸른 물결]
왕왕석현류정채(往往昔賢留精彩)[왕왕 옛날 현자들 정채로운 자취를 남겼지]
고운묘묘삽암기(孤雲杳杳鍤巖起)[고운 선생은 아득하고 삽암은 우뚝하네]
사월풍포정선생(四月風蒲鄭先生)[사월 화개에서 배 타고 내려가신 정 선생]
만경홍욱조부자(萬頃紅旭曺夫子)[만 이랑 물결에서 일출을 구경하신 조부자]
이아왕왕독하포(而我皇皇獨何抱)[그러나 난 방황하니 유독 무엇을 잡을 것인가]
백편래왕강변로(百遍來往江邊老)[무수히 왕래하였지만 여전히 강변의 늙은이 신세]
여년십칠배란숙(余年十七陪蘭叔)[내 나이 열일곱에 숙부님 모시고 유람와서는]
일소연의첩경도(一溯漣漪輒傾倒)[잔잔한 물결 한 번 거슬러 오르다 문득 토하였지]
이십하제구설귀(二十下第扣枻歸)[스무 살엔 낙제하고 뱃전 두드리며 돌아가는데]
어부조대질훈지(漁夫釣臺迭壎篪)[어부들 낚시하는 곳에선 번갈아 노랫소리 들렸네]
한수두진칠십리(寒水斗津七十里)[두치진의 찬 강물은 칠십 리나 흘러가니]
능풍농월하췌초(凌風弄月何顇顦)[바람 맞으며 달구경하기 어찌 시들하리?]
이후종사노산양(伊後從師蘆山陽)[그 뒤 노산 남쪽 노사 선생 찾아갈 적에]
월고장인동고상(月皐丈人同翶翔)[월고 어른도 나와 함께 동행을 했었네]
도정탕흉금표쇄(淘情盪胸襟飄灑)[온갖 생각 씻고 흉금을 말끔히 하고서]
교교효빈증점광(嘐嘐效顰曾點狂)[증점 같은 광자를 본받으려 하였지]
형제무고부모존(兄弟無故父母存)[형제가 무고하고 부모님 생존해 계시니]
시시오락거감훤(是時吾樂詎敢諼)[이 당시 나의 즐거움 어찌 감히 잊으리]
완천불사현익동(頑喘不死玄黓冬)[모진 목숨 죽지 못하고 맞이한 임인년 겨울]
산수연하양안혼(山水煙霞兩眼昏)[산수와 연하가 두 눈에 흐릿하게 보이네]
수령만곡청라대(遂令萬斛靑蘿帶)[마침내 만 섬의 시름이 청라 띠처럼 흘러내려]
곡곡오열화위루(曲曲嗚咽化爲淚)[굽이굽이 오열하다 드디어 변해 눈물이 되네]
우량적막미소계(踽凉寂寞靡所洎)[외로운 신세 적막하여 갈 곳이 없는데]
세월임염수공사(歲月荏苒水共駛)[세월은 강물처럼 무심히도 흘러갔네]
뇌유붕우시상수(賴有朋友時相隨)[벗들이 있는 덕분에 때로 서로 만나니]
위아초요강지애(爲我招邀江之涯)[나를 위해 섬진강 가로 초청을 했다네]
호회다재악양정(好會多在岳陽亭)[좋은 모음 악양정에서 여러 번을 했었지]
종산쌍계기도회(鍾山雙磎幾度回)[종산과 쌍계사를 몇 번이나 돌아보았던가]
승지은근성가록(勝地慇懃誠可錄)[명승 유람의 은근함 참으로 기록할 만하지]
고영기기구비석(顧影僛僛久非昔)[흔들리는 그림자 돌아보니 옛 모습 아니네]
단가가파수동류(短歌歌罷水東流)[짧은 노래 끝나자 강물만 동쪽으로 흐르니]
차심장여수유유(此心長與水悠悠)[이 마음 길이 저 물과 함께 아득하구나]
‘종산(鍾山)’은 구례군 노고단[1,507m] 서쪽에 있는 봉우리 종석대를 가리키는 듯하다. 최숙민은 구례에서도 여러 차례 강학을 하며 무너져 가는 도를 부지하려 애썼다. 제23구에 보이는 ‘현익(玄黓)’은 천간(天干)에서 임(任)을 가리키는데, 임인년은 1902년(고종 39)이고, 임진년은 1892년(고종 29)이다. 따라서 「섬진강」은 저자의 나이 66살 때인 1902년 또는 56살 때인 1892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위의 번역문에서는 ‘임인년’으로 하였다.
「섬진강」의 시적 정서는 비장미가 흐른다. 작자는 과거를 보아 세상에 나아가려는 생각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여 자연과 동화되는 삶을 지향한 공자(孔子)[B.C.551~B.C.479]의 제자 증점(曾點)처럼 살고자 한 사람이다. 즉 도를 구하고 도에 흠뻑 취해 본연의 성품을 지키며 사는 삶이다. 그런데 최숙민이 말년을 보낸 세상은 도가 무너져 가고 나라는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해 있다. 그래서 시인은 섬진강을 유람하면서 그 강물만큼 눈물을 쏟아내고 있다.
[특징]
장편의 고시이기 때문에 한 운자만 쓰지 않고 4구마다 운자를 바꾸어 쓰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섬진강」은 구한말 하동 옥종에 살던 유학자 최숙민이 섬진강을 유람하면서 자신의 삶을 회고한 서정시로, 작가의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다. 구한말 재야 지식인의 고뇌에 찬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한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