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6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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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相權 |
영어공식명칭 | Nam Sangg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성환 |
출생 시기/일시 | 1892년 11월 12일 - 남상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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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04월 11일 - 남상권 해남 독립 만세 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63년 08월 04일 - 남상권 사망 |
출생지 | 전라남도 해남군 군일면 읍내리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읍내리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면 본정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읍내리 |
활동지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면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768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3]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1919년 해남 지역 독립만세운동 참가 |
[정의]
일제강점기 해남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남상권(南相權)[1892~1963]은 1892년 11월 12일 지금의 해남군 해남읍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1일 해남읍 장날에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해남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은 1919년 4월 6일 해남공립보통학교(海南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남상권 등은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난 지 5일 후에 전개된 4월 11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해남읍 읍내리에서 잡화상을 운영하고 있던 남상권은 일제의 침략 정책에 반대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갈망해 오던 중에 3·1운동 소식을 듣고 독립 만세 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1919년 4월 1일 김동훈(金東勳)이 지역에서 신망이 높았던 안정석(安正錫)·안유석(安儒錫)을 찾아가 만세 시위를 논의한 뒤 4월 3일 방문하여 동참을 요구하자 남상권은 선뜻 동의하고 태극기 제작을 위한 백지 200매를 자진해서 내놓았다. 김동훈과 남상권 등은 이형춘(李亨春)·안창석(安昌錫)·손태옥(孫太玉)·남상권(南相權)·손승옥(孫升玉)·조종운(曺鐘運)·김흥봉(金興鳳)·김흥룡(金興龍) 및 읍내의 유지 김경두(金璟斗)·한창수(韓昌洙)·김영배(金永培)·천석균(千錫均) 등과도 연락을 취하여 뜻을 모았다.
남상권 등은 해남읍 남동리에 있었던 김동훈의 집에서 목판을 제작하여 종이 태극기 800여 매를 인쇄하였고, 당목으로 대형 태극기 6개를 만들어 시위를 준비하였다. 또한 구교리에 있었던 김양운(金良云)의 집에서 조종운·김흥봉·안창석·이형춘 등과 협의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4월 11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4월 6일에 있었던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거사를 군민들에게 알리며 분발을 촉구하였다.
1919년 4월 11일 거사 당일 남상권 등은 미리 제작해 천병유(千炳有)의 집에 보관했던 태극기를 해남로(海南路) 큰길로 운반하였고, 시장에 모여든 수백 명의 인파를 규합하여 정오를 기하여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에 동참하여 만세를 부르며 해남읍 곳곳을 누비는 사람들의 대열이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이 일로 남상권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남상권은 1963년 8월 4일 사망하였다.
[묘소]
남상권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3]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768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6년 대한민국 정부는 남상권의 공적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