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7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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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鍾運 |
영어공식명칭 | Jo Jong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성환 |
출생 시기/일시 | 1896년 11월 6일 - 조종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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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04월 11일 - 조종운 해남 지역 독립 만세 운동 참가 |
몰년 시기/일시 | 1971년 04월 07일 - 조종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조종운 건국포장 수훈 |
출생지 | 전라남도 진도군 삼촌면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신흥리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신흥리 |
활동지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면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제2-1068호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3]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1919년 4월 해남 독립 만세 운동 참가 |
[정의]
일제강점기 해남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조종운(曺鍾運)[1896~1971]은 1896년 11월 6일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신흥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1일 해남읍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해남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은 1919년 4월 6일 해남공립보통학교(海南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조종운 등은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난 지 5일 후에 전개된 4월 11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농사를 짓고 있던 조종운은 3·1운동 소식을 듣고 독립 만세 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김동훈(金東勳)·이형춘(李亨春)·안창석(安昌錫)·손태옥(孫太玉)·남상권(南相權)·손승옥(孫升玉)·김흥봉(金興鳳)·김흥룡(金興龍) 및 읍내의 유지 김경두(金璟斗)·한창수(韓昌洙)·김영배(金永培)·천석균(千錫均) 등과도 연락을 취해 뜻을 모았다.
조종운은 해남읍 남동리에 있었던 김동훈의 집에서 목판을 제작하여 김경두 등과 함께 종이 태극기 800여 매를 인쇄하였고, 당목으로 대형 태극기 6개를 만들어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구교리에 있었던 김양운(金良云)의 집에서 김동훈·김흥봉·안창석·이형춘 등과 협의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4월 11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4월 6일에 있었던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거사를 군민들에게 알리며 분발을 촉구하였다.
1919년 4월 11일 거사 당일 조종운 등은 미리 제작하여 천병유(千炳有)의 집에 보관하였던 태극기를 해남로(海南路) 큰길로 운반하였고, 시장에 모여든 수백 명의 인파를 규합하여 정오를 기하여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에 동참하여 만세를 부르며 해남읍 곳곳을 누비는 사람들의 대열이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이 일로 조종운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5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부분 취소되었으나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10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조종운은 1971년 4월 7일 사망하였다.
[묘소]
조종운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3]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제2-1068호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2년 대한민국 정부는 조종운의 공적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