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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 성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514
한자 世居 姓氏
영어공식명칭 Local Family Names of Hwaseong Area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기중

[정의]

경기도 화성 지역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같은 성과 본관을 가지고 살아 온 성씨.

[개설]

한국의 성씨 집단은 성씨와 본관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각 성씨 집단은 부계 혈연을 의미하는 성씨와 공간적 기원지라 일컬어지는 본관을 통해 다른 성씨 집단과 차별성을 갖는다. 성과 본관이 속한 가문을 나타낸다면, 이름은 동성동본의 성씨 내에서 종적 혈연관계를 나타내는 항렬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字)로 구성되어 있다. 성씨 제도를중국으로부터 수용하고 보급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특징적인 면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적인 성씨 및 본관 체제가 정착되는 시기는 고려 초기이다. 성씨와 본관은 특정 인물의 출신 성분을 표시하는 수단이었으며, 국가가 관직 진출자를 중심으로 본관을 파악하고 기록을 관리하였다. 이후 조선 시대에 들어 본관 체제는 더욱 확대되었고, 국가는 물론 민간 영역에서까지 성씨에 대한 기록과 관리가 늘어났다.

[화성 지역 세거 성씨와 집성촌의 형성]

화성 지역의 세거 성씨 중에는 화성 지역을 본관으로 하여 대대로 살아 온 성씨도 있지만, 외부에서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아 온 성씨도 존재한다. 이들 여러 성씨는 다양한 이유로 화성 지역에 입향하였고, 집성촌을 이루어 오늘날까지도 화성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화성 지역에는 조선 건국 초부터 정치적 이유로 다양한 성씨들이 이거하여 왔다. 그중 16세기에 입향하여 온 성씨들은 조광조의 영향을 받아 사림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중앙 정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화성 지역 세거 성씨들이 본격적으로 문중을 형성하고 향촌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다. 특히,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가 사화를 겪은 후 낙향한 남양 홍씨 등의 사림 세력이 향촌에서의 활동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 사족은 17~18세기에 각자의 근거지를 기반으로 향촌 지배권을 강화하는 한편, 서원과 사우 건립을 통해 가문의 위상을 높여 나갔다.

이러한 흐름을 거쳐 형성된 화성 지역 집성촌은 1930년대에 76개소, 1950년대에 201개소가 조사되었다. 그중 1950년대 자료에서 집성촌을 많이 이루고 있던 성씨는 전주 이씨[21개], 김해 김씨[13개], 경주 김씨[11개], 전주 최씨[8개], 밀양 박씨[8개], 광산 김씨[8개] 등이었으며, 화성 지역을 관향으로 둔 성씨 중에는 남양 홍씨[17개], 수성 최씨[7개], 수원 백씨[2개] 등이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남양읍 세거 성씨]

남양읍의 대표적인 세거 성씨는 수화리의 밀성 박씨와 원천리의 곤산 배씨이다.

수화리 밀성 박씨는 충헌공파(忠憲公派)에 속하며, 입향조는 13세 박한립(朴漢立)[1594~1636]이다. 박한립은 나주목사를 지냈고, 병자호란 때 전사하여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묘는 수화리에 있다. 수화리에 있던 창문국민학교는 수화리 밀성 박씨 종중에서 부지를 기증하여 설립되었는데, 창문이란 교명은 박한립의 아들 박창문(朴昌文)[1611~1636]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경기도지』[1957년]에는 수화리에 거주하는 박씨의 본관이 밀양으로 되어 있으며, 당시 83세대가 거주한 것으로 나와 있다.

원천리 곤산 배씨 입향조는 곤산군 배치인(裵致仁)으로, 곤산 배씨 시조인 배맹달(裵孟達)[1411~?]의 손자이다. 배맹달은 조선 세조 대에 발생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서강군(西江君)에 봉하여졌다가 곤산군(昆山君)으로 개봉되었다. 곤산 배씨 들은 원막을 중심으로 거주하였으며, 주로 통혼한 성씨는 시리남양 홍씨와 순흥 안씨이다.

[옛 동탄면과 태안읍 세거 성씨]

옛 동탄면과 태안읍의 대표적인 세거 성씨는 반남 박씨이다. 반남 박씨는 옛 동탄면 영천리·반송리·석우리와 옛 태안읍 반월리·기산리 등에 400년 이상 세거하여 온 것으로 추정된다. 동탄·태안 지역 일대에 거주하여 온 반남 박씨들은 7세 박강(朴薑)을 중시조로 하는 세양공파(世襄公派)의 지파 중, 11세 박주를 파시조로 하는 교위공파(校尉公派)와 12세 박찬(朴璨)[1566~1618]을 파시조로 하는 동곽공파(東郭公派)에 속한다. 반남 박씨 집안에서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박찬이 먼저 석우리로 입향한 이후 형 박려(朴瓈)의 아들 박대하(朴大夏)가 영천리로 들어왔다고 한다. 『경기도지』[1957년]에는 영천리에 35세대, 반송리에 20세대, 반월리에 30세대가 살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매송면 세거 성씨]

매송면 야목리 들목과 당곡은 풍양 조씨, 즉 ‘들목 조씨’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들목 조씨는 4세 조계팽(趙季砰)의 묘를 남양부 북쪽 소교촌 수작리(壽作里)에 쓰면서부터 화성 지역 일대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야목리풍양 조씨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조익(趙翼)[1579~1655], 조복양(趙復陽)[1609~1671], 조지겸(趙持謙)[1639~1685] 삼대이다. 삼대를 모신 명고서원(明皐書院)매송면에 있었으나, 고종 대에 훼철되었다.

[비봉면 세거 성씨]

비봉면 유포1리 대장골에는 한산 이씨 해산공파(海山公派)가 세거하여 왔는데, 입향조는 16세인 해산공 이문영(李文英)[1568~1658]이다. 이문영 이후 첫째 아들 이창조(李昌祚)의 후손들이 유포리에 대대로 세거하였다. 23세 이기년(李箕秊)[1787~1837]은 효행으로 정려를 받고 호조 좌랑에 증직되었다.

[봉담읍 세거 성씨]

봉담읍 분천리에는 함평 이씨 함성군파(咸城君派)가 세거하여 왔는데, 입향조는 함천군(咸川君) 이량(李良)[1446~1511]이다. 이량은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올랐다. 한편, 분천리 노루고개에는 함평 이씨분천리 세거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져 온다. 전설에 따르면, 이량의 아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노루가 알려 준 곳에 이량의 묘지를 쓴 후 함평 이씨 집안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송산면 세거 성씨]

송산면 고정리에는 교하 노씨 서원공파(瑞原公派)가 세거하여 왔는데, 입향조는 16세 노확(盧確)[1466~1533]이다. 노확은 대구도호부사를 역임하다가 송산면 일대에 10정보의 전답과 임야를 받고 낙향하였다. 선조의 유택(幽宅)은 고정리·서신면 전곡리·향남읍 구문천리 등에 있다. 고정리 교하 노씨는 주로 서신면남양읍남양 홍씨와 통혼하였다.

[우정읍 세거 성씨]

우정읍의 대표적인 세거 성씨는 청주 한씨해풍 김씨이다.

청주 한씨 집성촌은 우정읍에 6곳이나 형성되어 있다. 운평1리·운평2리·화산리·주곡리에는 문정공파(文靖公派), 운평3리·이화리에는 양절공파(襄節公派)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문정공파가 우정읍 일대로 입향한 시기는 사평공(司評公) 한극건(韓克建) 때로 17세기 중반경이다. 청주 한씨는 인근의 수성 최씨와 주로 통혼하였으며, 봉담읍의 경주 김씨, 정남면전주 최씨, 팔탄면전주 이씨와도 많이 혼인하였다.

해풍 김씨우정읍 화산리·호곡리·주곡리 일대에서 세거하였다. 7세 김장(金樟)[1438~?]을 파조로 하는 남양쌍부파(南陽雙阜派)에 속한다. 남양쌍부의 남양은 남양도호부를 가리키며, 쌍부우정읍장안면 일대에 해당한다. 입향조는 김장의 맏아들인 김수종(金壽宗)이다. 김수종은 16세기를 전후하여 우정읍 일대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김수종의 묘는 화산리 일원동에 있으며, 종가 역시 화산리에 있다. 묘소의 분포로 볼 때, 호곡리주곡리해풍 김씨가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엽 이후로 추정된다. 해풍 김씨전주 이씨, 청주 한씨, 남양 홍씨, 수성 최씨, 원주 원씨 등 일대의 유력 사족과 통혼하였다.

[양감면 세거 성씨]

양감면 요당리에는 전주 유씨 현풍공파(玄風公派)가 세거하여 왔다. 파조는 9세 유영하[1553~1626], 입향조는 유영하의 아들 유흘이다. 유흘은 아버지가 죽자 요당리에 묘를 쓰고 정착하였다. 일대에는 바닷물을 막아 조성한 방죽배미가 많은데, 유흘이 정착할 무렵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정남면 세거 성씨]

정남면의 대표적인 세거 성씨는 괘랑리연안 차씨백리의 거창 신씨이다.

괘랑리 연안 차씨는 조선 초 공신 차운혁(車云革)[1393~1467]을 파조로 하는 강렬공파(剛烈公派)에 속하며, 입향조는 차운혁의 증손자 중 넷째인 차사대(車思戴)이다. 족보에 의하면 16세기부터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연안 차씨가 화성 지역에서 처음 정착한 마을은 괘랑2리 남산밑으로, 현재까지 종손 계통이 거주하고 있다. 남산밑 차씨는 입향 이후 괘랑2 리에 속하는 각골, 빽골[수곡동] 등으로 세거지를 확대하여 갔다. 한편, 남산밑에는 1860년(철종 11)에 내려진 차운혁의 충신 정려문이 남아 있는데, 화성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백리의 거창 신씨는 신선경(愼先庚)[1420~1488]을 파조로 하는 동추공파(同樞公派)에 속한다. 신선경은 1455년(세조 1)에 아버지 신기와 함께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입향조는 18세 신결(愼潔)[1510~1580]이며, 신결의 후손들을 일컬어 동추공파 정송문중 또는 수원문중이라 한다. 백리의 거창 신씨 중 대표적인 인물은 23세 신이복(愼爾復)[1698~1786]인데, 문중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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