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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성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515
한자 貫鄕 姓氏
영어공식명칭 Clan seat of family name which originated Hawseong area
이칭/별칭 본관 성씨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기중

[정의]

경기도 화성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 집단.

[개설]

조선 초기 본관(本貫) 제도의 정착과 행정 구역 개편은 화성 지역 성씨 집단 정착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 시대 화성 지역은 수원도호부남양도호부가 관할하였다. 조선 전기 수원과 남양 지역에 정착한 성씨는 『세종실록지리지』[1454]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이들은 수원·남양을 비롯하여 속현인 쌍부·영신 등과 향·부곡·소였던 공이·주석 등지에 거주하였다. 이후 속현 및 향·부곡·소가 혁파되거나 주읍화되는 과정에서 해당 지역에 살고 있던 성씨들도 수원이나 남양으로 본관이 변화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 전반 화성 지역을 본관으로 삼고 거주하던 성씨로는 수원 최씨, 남양 홍씨, 수성 최씨, 남양 방씨 등이 있다.

[수원 최씨]

수원 최씨는 크게 최자성(崔滋盛)을 시조로 하는 계열과 최루백(崔婁伯)을 시조로 하는 계열로 나누어져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최자성은 과거 급제 후 인종(仁宗) 때에 특진 검교사도 수사공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特進 檢校司徒 守司空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최자성은 최서천(崔徐遷,崔書遷) 계열로, 최서천의 증손인 최사위(崔士威)와 최사위의 자손들이 계속 관직에 진출하면서 문벌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최루백은 수원 지역 향리 출신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과거에 급제한 후 의종 대에 기거사인(起居舍人)·국자사업(國子司業)·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였다. 아버지 최상저가 사냥 나갔다가 범에게 물려 죽자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장사지낸 후 무덤을 지켰다고 한다.

[수성 최씨]

수성 최씨는 고려 후기에 화성 지역에 정착하였다. 수성 최씨 시조는 최영규(崔永奎)인데, 원래는 경주 김씨로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다. 고려 충렬왕 때 수주(水州)[지금의 경기도 수원시]의 풍속을 바로잡은 공으로 수성백(隋城伯)에 봉하여지고 최씨 성을 사성(賜姓)받았다. 또 수주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다. 수성 최씨는 이후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일대를 기반으로 세거하였다. 수성 최씨는 3세조인 최원개(崔元凱)와 최문개(崔文凱)를 중시조로 하여 봉암공파와 종부령공파로 분파되었으며, 많은 후손들이 화성·평택·오산·수원 등의 지역에서 오늘날까지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다.

[수원 백씨]

수원 백씨는 백우경(白宇經)을 시조로 하고, 백창직(白昌稷)을 중시조로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화성 지역으로 온 내성(來姓)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조인 백우경은 신라 때 당나라에서 귀화한 인물로 좌복야(左僕射), 대사도(大司徒) 등을 역임하였다. 중시조인 백창직은 신라 경명왕 대에 중랑장(中郎將)을 지냈다. 시호는 영희(英禧)이다. 이외에 대표적인 수원 백씨 인물로는 973년(광종 24)에 과거에 급제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예부시(禮部試)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한 백사유(白思柔)가 있다. 조선 시대 인물로는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된 백수장(白壽長)이 유명하다.

수원 백씨가 언제부터 수원을 관향으로 삼았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다만 4대조인 백휘(白揮)가 고려 목종 대에 수원군(水原郡)으로 봉하여졌고, 백천장(白天藏)이 충선왕 대에 수원백(水原伯)으로 봉하여진 점이 참고가 된다. 또 가장 오래된 족보로 알려진 『영락보(永樂譜)』 서문에 조선 세종 대에 수원 백씨를 칭한 사실이 나타난다고 한다.

[수원 이씨]

수원 이씨는 이자송(李子松)[?~1388]을 시조로 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자송은 본래 청양(靑陽)[지금의 충청남도 청양군] 사람으로, 순위부(巡衛府) 상만호(上萬戶),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등을 지낸 문신이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수원 이씨 인물로는 대제학을 지낸 이장길((李長吉), 판밀직사(判密直事)를 지낸 이인기((李仁奇), 호조 참판을 지낸 이효신((李孝信), 공조 참의를 지낸 이영(李嶺),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영석((李永碩)과 이징명((李徵明), 승지 이세만((李世萬), 공조 판서 이휘백((李輝白) 등이 있다.

수원 이씨는 이자송 사망 후 후손들이 수원을 관향과 세거지로 삼아 세거하여 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씨족총보(朝鮮氏族總譜)』에 근거하여 이자송의 손자 이손(李孫)이 수성군으로 봉하여지며 수원이 관향이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수원 이씨 분파로는 청양파(靑陽派), 보녕파(保寧派), 장동파(長洞派), 백천파(白川派), 고잠파(高岑派), 서산파(瑞山派), 화성파(華城派), 서흥파(瑞興派), 진위파(振威派) 등이 있다. 시조묘는 충청남도 청양군 창양읍 교월리에 있으며, 향사(享祀)는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지낸다.

[수원 공씨]

수원 공씨는 공천원(貢天源)을 시조로 한다. 공천원은 1217년(고종 4) 거란 침입 당시 차상장군(借上將軍)으로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에 임명되어 적과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패배에 대한 책임으로 1217년 5월 대경(大卿)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1217년 11월 오군(五軍)과 가발병(加發兵)을 혁파하고 삼군(三軍)을 둘 때 다시 좌군병마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1222년(고종 9) 오수기(吳壽祺)와 함께 추밀원(樞密院) 부사(副使)가 되었으며, 이어 예부 상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이부 상서, 참지정사(叅知政事) 등을 역임하였다. 수원 공씨가 언제부터 수원을 관향으로 하였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남양 홍씨]

남양 홍씨는 토홍(土洪)과 당홍(唐洪)으로 나누어지는데, 화성 지역에는 토홍계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토홍의 시조는 홍선행(洪先幸)인데, 홍선행 이후 6세까지의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다만, 7세인 홍덕의(洪德義)의 묘를 남양부 서면 등동(燈洞)[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천등리]에 쓴 것이 확인되기 때문에, 홍덕의 이후 남양 일대에 거주하여 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홍덕의의 손자인 홍익생(洪益生) 때부터는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홍법리에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남양 홍씨 중 당홍은중국 당나라에서 고구려로 건너온 8명 중 1명인 홍천하(洪天河)를 시조로 하며, 홍천하가 당성[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 정착하면서 남양을 본관으로 갖게 되었다고 전한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남양 홍씨는 황해도 토산이나 경상도 진주 등지로 지역 기반을 확대하였는데, 일부는 여전히 남양 지역의 토성으로 남아 세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양 갈씨]

남양 갈씨는 제갈씨(諸葛氏)에서 나누어진 성씨이다. 제갈씨의 시조는 제갈량(諸葛亮)의 아버지 제갈규(諸葛珪)이며, 제갈규의 20대손인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신라로 귀화하여 한국 제갈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 고종 대에 이르러 제갈홍(諸葛泓)과 제갈형(諸葛瀅) 형제가 각각 제씨(諸氏)와 갈씨(葛氏)로 성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고려 고종 때 총 22본의 갈씨가 있었다고 전하여지는데, 남양 갈씨를 제외하고는 시조를 알 수 없다.

남양 갈씨의 주요 인물로는 고려 시대에 판관(判官)을 지낸 갈현(葛俔), 서성백(西城伯) 갈은(葛濦), 태수(太守) 갈춘(葛椿), 갈희(葛熙), 교위(校尉) 갈희(葛羲), 시랑(侍郞) 갈원(葛源), 도독(都督) 갈문희(葛文禧), 화산군(花山君) 갈현(葛顯), 어사(御史) 갈인규(葛寅奎), 대구군(大丘君) 갈원(葛薳), 부사(府使) 갈지만(葛之蔓), 효자 갈덕래(葛德來) 등이 있다.

[남양 방씨]

남양 방씨의 시조는 방계홍(房季弘)으로, 나말여초에 본관을 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양 방씨가 방계홍 때부터 남양 지역에서 세거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4세 방원요(方元要)의 딸이 남양 홍씨 1세조 홍은열의 손자 홍의와 혼인하였는데, 지역 내혼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화성 지역에서 남양 방씨 묘는 13세부터 확인된다.

[남양 김씨]

남양 김씨는 김남귀(金南貴)를 시조로 한다. 『전고대방(典故大方)』에 의하면, 김남귀(金南貴)는 숙종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을 지냈다고 한다. 남양 김씨의 입향 경위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남양 전씨]

남양 전씨는 전풍(田豊)을 시조로 한다. 1774년(영조 50)에 간행된 『남양전씨족보(南陽田氏族譜)』에 따르면,중국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재직하던 전풍이 고려로 건너와 남양군(南陽君)에 봉하여졌다고 한다. 남양 전씨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태종 때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세종 때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이른 전흥(田興)이 있다. 또한 전림(田霖)은 1482년(성종 13)에 무과에 급제하고 좌상대장(左廂大將),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권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위절(威節)이다. 시조인 전풍이 남양군에 봉하여진 것으로 볼 때, 고려 초기부터 화성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남양 서씨]

남양 서씨는 서간을 시조로 하며,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양부의 토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간은 신라 문무왕 때 당나라에서 건너와 당성(唐城)[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벼슬은 태사(太師)에 올랐으며, 남양군(南陽君)에 봉하여졌다. 남양 서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효자 정려(旌閭)를 받은 서충필(徐忠弼) 서충좌(徐忠佐) 형제, 선무랑(宣務郞) 서정지(徐挺之)의 아들인 서한주(徐漢柱) 등이 있다. 서한주는 1646년(인조 24) 과거에 합격한 후, 안악군수(安岳郡守), 온양군수(楊根郡守), 공조 좌랑 등을 지냈다. 시조 서간이 남양군에 봉하여진 것으로 볼 때 처음부터 화성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남양 송씨]

남양 송씨는 송규(宋奎)를 시조로 한다. 송규는 당나라 출신으로 신라에 귀화하여 경순왕 때 이부 상서를 지냈고,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송림리에 정착하여 일생을 보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후 가계가 불분명하여 고려 말에 정당문학(政堂文學), 감찰대부(監察大夫) 등을 지낸 송세보(宋世輔)를 1세로 삼고 있다. 송세보는 1384년(우왕 10)에 사망하였으며, 남양군(南陽君)에 봉하여졌다.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남양 송씨 인물로는 병부 상서를 지낸 송충(宋忠), 문하시중(門下侍中) 송침(宋琛) 등이 있으며, 조선 시대 인물로는 세종 때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송구(宋玖), 좌통례(左通禮) 송석(宋奭) 등이 있다.

[재양 서씨]

재양 서씨는 화성 지역의 옛 지명인 재양(載陽)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양 지역의 내성(來姓)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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