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4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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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乙卯倭變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문안식 |
[정의]
1555년 5월 왜구가 전라도 남해안에 침입하여 전라남도 화순 지역 출신의 달량 권관(達梁權管) 조현(曺顯)[?~1555]이 전사한 사건.
[개설]
조현의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희경(希慶), 호는 월헌(月軒)이다. 을묘왜변 때에 왜구 토벌에 나섰다가 전사한 무신(武臣)이며, 사후(死後) 조정에서 몇 차례에 걸쳐 포상을 실시하였다.
[역사적 배경]
16세기 초 조선은 삼포왜란(三浦倭亂)과 사량진 왜변(蛇梁鎭倭變) 등이 일어난 후 세견선(歲遣船)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왜인들은 완화 조치를 요구하여 왔으나 조선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조선의 통제에 대해 불만을 품은 왜인들은 1555년(명종 10)에 전라도 연안 지방에 선박 70여 척을 이끌고 와서 습격하였다. 이 사건이 이른바 을묘왜변이다.
[경과]
왜구는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있는 달량성(達梁城)과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에 있는 어란포(於蘭浦), 진도군의 금갑(金甲)과 남도(南桃) 등의 보루(堡壘)를 불태우고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장흥군과 강진군에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를 막던 무신 원적(元積)[?~1555]과 장흥 부사 한온(韓蘊)[?~1555]을 비롯하여 달량 권관 조현 등이 절벽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결과]
조선 정부는 호조 판서 이준경(李俊慶)[1499~1572]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慶錫)[?~?]과 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로 삼아 왜구 토벌에 나서 영암에서 크게 무찔렀다. 왜구가 물러간 후 쓰시마의 도주(島主)는 을묘왜변에 가담한 왜구들의 목을 베어 보내 사죄하고 세견선의 부활을 거듭 요청하였다. 조선은 세견선 5척을 허락하였고, 이는 임진왜란 발생 전까지 계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정에서는 조현의 용기와 기개를 높이 추앙하여 병조 참의에 추증하였다. 1685년(숙종 11)에는 능주 향교의 유림들이 충신강 절벽 위에 3동의 건물을 세우고 삼충각(三忠閣)이라 하였다. 삼충각에서는 조현 외에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최경회(崔慶會)[1532~1593]와 문홍헌(文弘獻)[?~1593]의 우국 충절을 함께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