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505 |
---|---|
한자 | 東學農民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광철 |
[정의]
1894년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 운동.
[개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하고 12월까지 이어진 나주 공략이 실패하면서 동학 농민군 일부가 화순 지역과 그 인근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그 중 최경선(崔景善)[1859~1895]의 지휘를 받은 농민군이 인접한 남평 관아를 일시 점령하기도 했으나 곧 이은 나주 수성군(守成軍)의 역습과 민보군(民堡軍)[농민군 토벌을 위한 민병 부대]의 공세에 밀려 고전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화순 주변의 상황]
동학 농민 운동의 1차 봉기 기간인 1894년 8월까지 화순 지역에는 동학교도들의 일정한 조직과 활동이 있었다. 7월에 화순 지역과 나주 지역의 동학교도 20여 명이 전라북도 고부의 동학 지휘소를 방문했던 일이나 비슷한 시기 능주 관아에 대도소(大都所)를 설치·운영했던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평온한 편이었다.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가 일어나면서 상황은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전투는 주로 장성·나주·함평·무안 순으로 이어지며 전개되었다. 특히 나주는 농민군과 관군 모두에게 초미의 관심 지역이었다. 나주는 서부 지역을 따라 장성·함평·무안을 잇는 농민군의 활동 및 통신의 중간 지점에 있었고 집강소의 설치를 거부한 지역이었으며, 향후 나주 수성군의 후방 공격 또는 해상을 통한 일본군의 우회 상륙이 예산되는 거점이었다. 농민군의 유력한 지도자인 손화중(孫華仲)[1861~1895]과 최경선이 나주 일대에 머물며 견제 및 공략하고자 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농민군의 나주 공략]
동학 농민 운동의 초기부터 나주 지역의 수성 의지는 인근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 이례적일 만큼 강했고 농민군은 3차에 걸쳐 나주성 공략을 추진하였다. 우선 1894년 10월 나주 북쪽인 지금의 광주광역시 평동·삼도동·본량동[이들 지역은 당시 행정 구역상 나주에 속함]에서 나주읍성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성군의 기습에 밀려 침산·선암 나루·용진산 전투에서 연달아 패해 농민군의 주력은 황룡강 북쪽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11월이 되자 농민군은 나주 남쪽에서 두 번째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나주 지역과 함평 지역의 지리적 경계선인 고막원천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화포를 앞세운 수성군의 반격에 막혀 이 역시 저지당했다. 농민군은 같은 달 북쪽인 나주 노안 지역에서 재차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숙영지인 남산[현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용산남산길 남산 마을 일대]에 머물러 있던 중 수성군의 야간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면서 나주 공략의 열망은 물거품이 됐다. 공주에서 또 다른 농민군이 패전하고 강력한 토벌대가 전라도 지역으로 진입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나주 공략 부대는 해산을 결정하고 화순 지역 등 전라남도 동부 지역으로 그 일부가 물러났다.
[농민군의 화순 지역 유입]
나주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화순 지역은 격전지로부터 다소 비켜난 위치에 있었던 까닭에 직접적으로 전화를 입지는 않았다. 대체로 1894년 11월 말까지는 비교적 평온을 유지했다. 그러나 광주에 은신해 있던 농민군 지도자 최경선 등이 화순 지역으로 철수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최경선의 농민군이 화순 지역으로 철수한 것은 이곳이 나주와 광주의 인접 지역이라 향후 상황 추이를 관찰하기 좋고, 배후에 보다 험준한 산악이 있어 유사시 퇴로 및 재편성의 공간으로 삼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화순 지역 농민군의 반격과 후퇴]
화순 지역에 온 농민군은 화순군 능주면과 나주시 남평읍 일원, 즉 영산강의 지류인 지석강 일대에 머물렀다. 농민군은 거듭된 전투로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고, 나주의 토벌대[수성군]의 우세가 뚜렷해진 상황이었음에도 12월 3일 돌연 남평 관아를 급습해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곧바로 나주의 토벌대가 남평으로 진출하자 농민군은 다시 후퇴했다. 허술한 남평 관아의 방비를 뚫고 점령을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중화기로 무장한 나주 토벌대와 전면전을 치르기에는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농민군은 2개 제대로 나뉘어 후퇴했다. 일부는 장흥 방면, 일부는 최경선의 지휘 하에 화순 지역 남면으로 후퇴했다.
[화순 농민군의 최후]
최경선의 농민군이 후퇴하여 은신한 곳은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벽송리 일대에 있는 산촌이었다. 한겨울이라 행군을 중단하고 이곳에서 유숙하며 당분간 사태를 관망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돌연 민보군의 습격을 받아 200여 명 가운데 상당수가 현장에서 총살당하고 최경선 등 생존자들은 피체되어 압송되는 처지를 맞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화순 지역에서 농민군의 활동은 사실상 종결됐다. 이후 민보군을 중심으로 화순 지역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색출과 처형이 이어졌다.
[결과]
화순 지역에서 동학 농민군에 대한 보복은 벽송 마을 전투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기록된 것만 보아도 화순군에서는 12월 8일 왕일신 등 4명이 체포되고 처형당한 것을 시작으로 12월 10일까지 10여 명이 체포되었고, 최유칠 등은 고문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능주군에서는 12월 11일까지 13명이 체포되어 살해되었고 이듬해 1월까지 조종순 등이 잡혀 처형당했다. 동복군에서도 12월 8일 최자중 등 3명이 체포되어 압송 중 3명 모두 죽임을 당했고 이듬해 1월에도 박문주 등이 잡혔다. 이러한 색출과 처형은 해당 관아가 직접 나서 행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상당수는 지역 유력자들이 주도한 토벌대가 진행하였다. 그중 일부는 이때의 일로 훗날 『갑오군공록(甲午軍功錄)』 등에 이름이 오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