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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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碧松-戰鬪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벽송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광철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894년 12월 - 벽송 마을 전투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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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벽송 마을 -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벽송리 |
종결 장소 | 벽송 마을 -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벽송리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최경선 |
[정의]
1894년 12월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벽송리 일대에 은신 중이던 동학 농민군이 지역 민보군과 벌인 전투.
[역사적 배경]
1894년 겨울 나주와 광주 일원에서 관군에 밀린 동학 농민군의 일부는 험준한 산악 지역인 화순 지역으로 퇴각했다. 이곳에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던 농민군은 능주면을 장악하고 다시 12월 3일 지석강 아래쪽인 남평군 관아를 점령하는 등 역습에 성공한다. 그러나 곧이어 나주의 토벌대가 출동하자 농민군은 다시 화순군 남면 벽송리 일대로 퇴각하였다. 당시 농민군은 최경선(崔景善)[1859~1895]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경과]
벽송 마을은 당시 행정 구역상 동복군과 능주군의 접경으로 주변은 높은 능선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비교적 출입이 용이한 통로는 서밧재 고개를 넘어 화순군 동면으로 가는 길[현 국도 15호선]과 능주 쪽으로 통하는 호젓한 산길[현 지방도 822호선]이 있는 정도였다. 반면에 동쪽으로는 보성강 지류를 타고 순천으로 빠지는 퇴로[현 국도 15호선의 연장부]가 있었다. 벽송 마을에 유숙하던 200여 명의 농민군은 이런 지형을 활용해 나주 토벌대의 진입을 쉽게 감시하고 유사시에는 보다 험준한 순천 지역으로 퇴각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벽송리의 농민군이 경계했던 나주 토벌대는 남평 관아의 탈환 이후에 곧바로 나주의 본진으로 철수했다. 따라서 나주 토벌대의 추격은 없었다. 때문에 벽송 마을의 농민군도 다소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무렵 화순 지역 일원에서는 지역 유지들로 구성된 자체 토벌대인 민보군이 조직된 상태였다.
1894년 겨울에 전세가 확연히 관군에 유리하게 전개됨에 따라 이러한 민보군의 세력도 더욱 확장되었다. 이들은 ‘참모소’ 등 여러 이름으로 조직되어 농민군의 낙오자나 동조자를 색출하고 소탕하기 시작했다. 분산적으로 조직되어 운영된 이들 민보군 중 어떤 부대가 벽송리의 농민군을 습격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일단의 민보군이 벽송리와 인근 사평리에 있던 최경선의 농민군을 기습했다. 이 기습으로 220명이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157명은 현지에서 총살당했고 63명은 생포되었다. 최경선도 벽송리에서 생포되어 일본군에게 이첩되었다.
[결과]
벽송 마을 전투 이후 화순군에서는 동학 농민 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소탕 선풍이 불었다. 당시 행정 구역상 화순군에서는 12월 8일 왕일신 등 4명이 체포 및 처형되었으며, 12월 10일까지 10여 명이 체포 및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능주군에서도 12월 11일까지 13명이 체포되어 살해되었고, 이듬해 1월에도 관련자 색출이 계속되어 조종순 등이 처형당했다. 동복군에서도 12월 8일에 최자중 등 3명이 피체되고 압송 중 3명이 모두 죽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호송 과정에 처형된 듯하다. 이듬해 1월에도 동복군에서 박문주 등이 체포되었다.
이처럼 벽송 전투는 화순 지역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궤멸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화순 지역에서 농민군의 활동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남평 관아 습격 후 일부 농민군은 벽송리 대신에 장흥 방면으로 철수했고 이들은 이후 장흥·강진 지역을 장악한 후 12월 15일 석대들 전투에서 최후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