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342
한자 近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집필자 정제우

[정의]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충청북도 진천 지역의 역사.

[개설]

한국 역사에서 시대구분의 기준은 시간적 의미에서 보면, 고려 이전을 고대, 고려를 중세, 조선을 근세, 문호개방 이후 일제강점기를 근대, 그리고 해방 이후를 현대라는 용어로 사용하는 데에 인식을 같이하고자 한다. 물론 고대·중세·근세·근대·현대라는 용어는 단순한 시간의 전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사회발전 즉 고대는 연맹국가와 귀족국가, 중세는 귀족·관료국가, 근세는 관료국가, 근대는 산업국가, 그리고 현대는 민주국가 등의 개념과 깊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산업 국가는 일제의 침략으로 좌절되었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문호개방 전후의 조선사회(1863~1894)]

19세기 전반기의 조선은 세도정치로 사회가 극도로 불안하고, 밖으로 서양열강이 중국에 침투해 오는 등 위기의식이 고조되는 때였다.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정치의 실권은 그의 부친 이하응(李昰應)[흥선대원군]이 장악하게 되었다[1863].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모순을 시정하고 부강한 왕조국가를 중흥시키려고 정치·사회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서원철폐, 양전사업, 경복궁 중건, 국방강화, 내정개혁 등으로 중앙집권체제를 안정시키고 부국강병을 강화하는 데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대원군의 혁신정치의 결과 국력이 신장되고 여러 계층의 지지를 얻는 데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강경한 통상거부정책을 취해오던 대원군은 집권 10년 만인 1873년(고종 10)에 권좌에서 물러나고, 고종명성황후(明成皇后)[민비] 일족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고종과 그 측근은 국정의 방향을 대원군이 이룩한 내정개혁과 방어 정책을 바탕으로 하여 왕조의 기틀을 유지하면서 외국의 과학기술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개화정책으로 선회하였다.

이 시기 일본 메이지 정부는 내면적으로는 조선침략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표면상으로는 정한론(征韓論)을 누그러뜨리고 종전의 관행대로 통상을 요구해 왔다. 1875년(고종 12)에 중무장한 군함 운양호(雲揚號)를 강화도에 접근시켜 조선의 발포를 유도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일본 내의 반한 감정을 고취시키고,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면서 수교회담을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는 박규수(朴珪壽)·신헌(申櫶)[진천 출신] 등의 의견을 들어 1876년(고종 13) 통상조약[병자수호조약,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강화도조약은 불평등 조약으로, 일본에 유리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조선으로서는 종전의 교린정책을 약간 수정하는 선상에서 타결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무난하게 받아들였다.

이후 정부는 자주국의 입장에서 청과 일본에 이어 서양 세력에 대해 세력균형 정책으로 미국[1882]·영국[1883]·독일[1883]·이탈리아[1884]·러시아[1884]·프랑스[1886] 등과도 잇달아 통상조약을 맺었다. 이와 같은 정부의 통상정책과 동도개화정책(東道開化政策)의 추진은 지방 유생을 중심으로 한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반발을 유발했고, 나아가서 임오군란(壬午軍亂)[1882]과 청의 내정간섭을 가져왔다.

청의 내정간섭은 조선 정부의 자주권이 크게 침해된 것을 의미하지만 일본의 침투를 견제하는 효과를 가져온 측면도 있다. 김옥균 등 친일 변법개화파(變法開化派)는 쿠데타[갑신정변, 1884]에 실패하였고, 갑신정변의 뒷마무리[한성조약, 천진조약]가 끝나면서 청·일 간에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당분간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청·일의 경제침투는 더욱 가속화되었고, 농촌은 더욱 피폐되어 갔으며 마침내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으로 폭발되었다.

19세기 진천은 기존 지배질서가 동요하는 가운데 양반이 중심이 된 상하관계의 사회구조가 유지되었다. 경내의 정치질서는 진천현 관아가 정점이 되었다. 현감은 정6품으로 문관과 무관 또는 음직으로 부임하였다. 관아는 커다란 기와집이 몰려 있어 인근의 낮은 초가집이 늘어선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관아와 협조관계를 유지하는 향청이 있어 필요할 때마다 경내의 상급 양반들이 모여서 향촌의 문제를 논의했고, 평소에는 좌수와 별감이 그때그때 일을 처리해나갔다.

19세기 진천의 호적대장에 의한 인구는 원호 5,469호에 남자는 13,305명이고, 여자는 16,367명이었다. 인구의 9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경작 면적으로 밭이 4,526결(結) 8부(負) 7속(束), 논은 2,209결 88부 9속이었다. 이 시기 국가의 조세 수취구조가 극도로 문란했으므로 각지에서는 농민항쟁이 벌어졌다. 농경지가 넓었던 진천도 조세 수탈이 극심한 곳에 속했다. 조세 명목은 전정·군정·환곡과 진상, 요역 등이었다.

토지에 부과한 이러한 세금은 매년 결전(結錢)을 정해서 납부했다. 진천 농민이 내는 결전은 충청도 어느 군현과 비교해도 많은 수준이었다. 1876년(고종 13) 충청도 각 군현에 책정한 결전을 보면, 대도시인 청주가 45량(兩)인데 진천은 42량으로 정해졌다. 반면 척박한 토지가 많은 보은은 약 17량, 영동·회인·황간·청산은 23~24량 정도였다. 이 시기에 농촌사회에 막대한 타격을 준 것은 자연재해였다. 특히 최악의 흉년은 1876년, 1883년(고종 20), 1888년(고종 25), 1894년이었다. 흉년을 버틸 힘도 없는 농민들은 유랑하여 화전민이 되거나 산적·수적·화적이 되었다.

한편 문호개방 이후 조선의 대외무역이 활발해질수록 농촌 사회는 갈수록 피폐해졌다. 불평등조약 체제에서 이루어지는 무역구조는 기본적으로 약탈성을 띠고 있어서 조선의 농민·어민·상인,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곡물 수출과 섬유류 수입이 농촌사회에 큰 해를 끼쳤다. 진천 향촌민들도 조선 말의 모순된 사회 구조 속에서 어렵게 살아갔다.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경장기]

변법개화파의 혁명운동인 갑신정변을 진압한 후 고종과 황후 측근세력은 자주적 동도개화정책을 다양하게 추진해갔다. 근대 교육기관과 근대 의료기관 등 근대 문명시설을 도입·보급하였고, 외교의 다변화와 자립경제 수호정책을 추진하였다. 조선이 개항 이후 일본에 강점되기까지 34년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고종의 외교력이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열강의 각축은 조선과 지리·역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청·일 두 나라의 경쟁관계로 좁혀졌다.

1860년(철종 11)에 민중종교로 창도된 동학(東學)이 농민층 사이에 급속히 전파되는 것을 우려한 정부는 1864년(고종 1) 교주 최제우(崔濟愚)를 혹세무민의 죄로 몰아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1870~1880년대에 들어와 열강과 불평등조약을 맺고, 약탈적 무역구조 속에서 농촌사회가 더욱 곤궁한 처지에 빠지자 동학은 한층 호소력을 가지면서 퍼져나갔다.

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포교 활동 등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세력 확장에 자신감을 얻은 동학 지도자들은 억울하게 처형당한 교조의 누명을 벗고, 포교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하여 1892년(고종 29)부터 1893년(고종 30) 3월, 4월 3차에 걸쳐 종교투쟁을 벌였다. 보은집회 때는 2만여 명의 신도가 교조신원의 요구를 벗어나 보국안민(輔國安民)·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걸고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교조신원운동은 이렇게 하여 사회개혁운동으로 한 단계 발전해갔다.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의 집결 지시가 떨어지자 동학교도들은 구름 같이 보은 장안에 모여 들었다. 매일 각처에서 각각 수백 명 단위로 몰려와서 불과 며칠 만에 수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진천의 동학 도인들도 장안마을의 집회에 많은 수가 참가했다. 보은 관아에서는 진천접 도인 50여 명이 집회 장소에서 활동했다는 내용을 탐지하고 있었다. 정부는 교인들을 달래는 정책을 쓰면서, 한편으로 관군을 출동시켜 진압에 나섰다. 호우와 식량 부족으로 지쳐 있던 교인들은 충청도관찰사 등의 처벌을 조건으로 일단 자진해산하여 사태가 수습되었으나, 그들의 요구가 관철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불만은 여전히 쌓여 있었다.

제1차 동학농민전쟁[1984. 2.~1894. 6. 11]의 발단이 전라도 고부접주 전봉준(全琫準)의 지휘 아래 1,000여 명의 농민이 고부관아를 습격·점령하면서 전개되더니, 4월에는 ‘보국안민’을 위해 봉기하라는 통문을 사방에 보내 8,000명의 대오를 구성하여 조직적인 항거에 나섰다. 전봉준을 대장으로 한 농민군은 정읍·고창·무장·영광·함평·무안·나주를 거처 쉽게 전주감영을 점령하게 되니, 6월 초순에는 전라도 일대가 사실상 농민군의 지휘에 들어갔다.

청의 원세개(袁世凱)는 임오군변 이후 반청 감정이 높아진 조선 민중을 제압하기 위해 출병했다. 일본군도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출동하여 청·일 두 나라의 군대가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부와 농민군은 되도록 외세의 개입이 없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휴전교섭을 벌인 끝에 1894년 6월 12조의 개혁안이 합의된 이른바 전주화약이 맺어졌다.

그러나 정부와 농민이 협조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정부의 파병요청으로 청국군이 아산만을 통하여 들어오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군이 인천을 통해 서울로 들어와 궁궐을 점령하였다[1894. 7. 23, 갑오변란]. 일본군은 황후척족 세력을 밀어내고 대원군을 내세웠다. 그리고는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제2차 동학농민전쟁[1894. 10]은 일본군의 왕궁 점령에 분격한 농민군이 척왜(斥倭) 구호를 내걸고 재기한 것이다. 10만여 명의 전라도[남접] 농민군과 10만여 명의 충청도[북접, 교주 최시형 승인하의 손병희 지휘] 농민군 남북연합군은 일본군의 병참기지를 습격하고 전신줄을 절단하면서 서울을 향해 북상하다가, 공주 우금치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약 일주일간 50여 회의 공방전을 벌인 끝에 참패하였다.

1차 농민전쟁의 결과인 전주화약에 따라 북접 충청도 각 군현도 집강(執綱)을 정해서 조직적인 개혁활동에 들어갔다. 7월 이후 충청도 전역은 동학의 세상이 되었다. 집강소는 원성을 산 양반과 향리를 징치하면서 지주 부농에게 협력을 강요하는 일을 동시에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향촌사회의 지배층은 반감을 갖게 되었다. 또 유생들은 명분을 부정하는 동학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일본의 침략을 눈앞에 보면서 민족 내부의 갈등이 커져갔다. 9월에 들어 전봉준이 다시 봉기를 결정하자 무장활동을 반대하던 교주 최시형도 대세를 받아들여 9월 18일 기포령을 내렸다. 기포령 직후 진천 광혜원에는 충주 대접주 신재련(辛在蓮)이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집결시켰고, 충주 용수포에는 진천에서 활동하던 대접주 허문숙(許文叔)과 서장옥(徐璋玉)이 이끄는 대규모 세력이 모였다. 진천의 동학 도인들도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부농 지주의 곡식과 금전을 강제로 거둬서 군수미와 군수전을 확보하였다.

이 과정에서 도순무사 신정희(申正熙)의 향리인 진천 본가도 침범되었다. 이에 각 군현 수령들이 범인을 체포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동학의 위세가 관아를 능가하던 가을까지는 별다른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9월 29일에는 안성과 이천에서 집결해 보은으로 내려가던 수만 명이 진천읍내로 몰려왔다. 이들은 현감 안정수(安鼎壽)와 여러 관속들을 결박한 다음, 진천 관아의 무기고를 부수고 모든 무기를 가져갔다. 이후 대규모 북접농민군은 통령 손병희가 지휘해서 남진하여 전봉준의 남접농민군과 합세하였다.

진천과 충주 지역에 대규모 동학농민군이 집결했고, 이들 조직과 밀접히 연결된 경기도 죽산과 안성 관아도 점거당했다. 이에 정부는 1894년 9월 20일경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李斗璜)을 죽산부사에, 경리청 영관 홍운섭(洪雲燮)을 안성군수에 임명해서 군대를 인솔하도록 했다. 그리고 정부는 9월 22일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관군을 통괄 지휘할 임시 최고군사지휘부인 양호도순무영을 설치하고 도순무사(都巡撫使)에 호위부장(扈衛副將) 신정희를 임명하였다. 신정희는 종사관으로 정인표(鄭寅杓)를 임명했다.

한편 정부는 지주 양반 등 보수 지배층의 자구책인 농민군 토벌조직 민보단(民堡團)의 활동을 공권력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진천 지역에서 활동한 민보군 지도자는 경기도 지평의 맹영재(孟英在)였는데, 그는 이 공으로 지평현감에 임명되었다. 결국 동학농민전쟁은 애국적인 농민 항거로 끝났으나, 이때의 실패 경험을 바탕으로 반일 애국주의가 다음 시기의 의병운동에 양반 유생과 함께 참여하는 성숙성을 보여주었으며, 농민들의 내정개혁 요구는 갑오개혁(甲午改革)에 부분적으로 반영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1894년 7월 일본군은 청·일전쟁을 도발하고 전주화약으로 정국이 소강상태를 이루고 있을 때,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고종을 포로로 만든 상황에서 일본이 요구하는 약 210건의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이를 갑오개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해 12월에서 다음해 7월까지 총 213건의 개혁안을 제정·실시하였다[제2차 개혁]. 1895년에는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일본의 조정 아래 140여 건의 법령을 공포하였다[을미개혁].

진천 사회에도 이런 격변 속에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갑오개혁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추진되었다. 중국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을 사용하며 독자적 연호를 썼다. 그리고 의정부를 내각이라 고치고, 과거제도를 폐지, 새 관리 등용법을 만들었다. 조세도 탁지부로 일원화해서 관장하고, 신식화폐를 사용해서 세금을 돈으로 내도록 했다.

향촌사회를 가장 크게 뒤흔든 새로운 조치는 사회개혁으로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고 공사노비제, 반상문벌, 죄인연좌제 등을 혁파한 것이었다. 이제 근대의 자유·평등 윤리가 통용되는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러나 사회생활의 관행은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양반 지주의 땅을 빌려 경작하던 농민들은 지주 면전에서 불경한 짓을 할 수 없었다. 세금의 금납화도 농민에게는 불리한 것이었다. 2차 개혁으로, 지방제도는 군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府), 337군(郡)으로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진천현은 진천군이 되어 충주부의 관할 아래 들어갔다.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쓴다든지 과거제를 페지한다든지 하는 것 외에 특히 국민의 반발을 받은 사건이 1895년 10월[음력 8월 20일] 을미사변과 단발령[상투 금지], 양복 착용이었다. 국민들은 국모 시해와 단발령에 항거하여 일본과 친일파 관료들을 응징하기 위한 무력투쟁인 의병을 조직하여 봉기하였다.

의병운동의 효시는 갑오개혁을 계기로 1894년 8월에 일어난 안동 서상철(徐相轍) 의병에서 비롯하였으나, 을미의병 때 와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896년 여름에 대개 해산하였다. 이들은 관군 및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면서 지방의 친일 관료들을 처단하였으며, 군사시설을 파괴하였다.

진천 지역에서의 초기 의병활동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허위(許蔿)의 김산 의병부대가 1896년 3월 10일 김산 전투에서 패한 후 흩어진 군사를 수습해서 상경하기 위해 진천 지방에 머물렀다. 이때 근신 전경운(田慶雲)이 고종황제의 전지를 가지고 와서 의병 해산을 종용하기에 이르자, 허위는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에도 진천 출신 의병이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근대 대한제국의 개혁·좌절]

일본의 국모 시해 만행과 일본 주도의 일련의 개혁은 일반 국민들의 반발을 샀다. 이에 항거하여 의병운동이 일어나고 반일적 정서가 팽배하였다. 특히 국가의 자주독립과 국왕의 위상을 높이는 일과, 국민 정서에 맞는 제도를 일부 옛날로 되돌려 놓는 일이 시행되었다. 단발령 폐지, 음력의 부분적 사용 그리고 23부로 개편되었던 지방행정구역의 13도 환원 등이 그것이다. 이때 진천은 충청북도에 포함되었다.

아관파천(俄館播遷)[1896. 2. 11~1897. 2. 20]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동도개화파들을 등용하고, 구본신참(舊本新參)과 민국(民國) 건설의 통치이념 아래 부국강병의 개혁작업[광무개혁]에 나섰다. 고종은 1897년 8월 16일 연호를 광무(光武), 10월 12일 제천단인 원구단(圜丘壇)에 나아가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었다. 광무개혁의 하나로 1899~1903년에 토지조사사업[양전]과 지계(地契)[토지증서] 발급사업을 실시하였다.

진천은 15개 면 전부가 조사되어 양안(量案)이 작성되었다. 요컨대 광무개혁은 전제군주제를 강화한 것이지만, 강력한 황제권을 바탕으로 짧은 기간 안에 국방·산업·교육·기술면에서 상당한 근대화의 성과를 거두었다. 만약 일본의 침략과 방해가 없었다면 대한제국은 빠른 속도로 근대 산업국가로 진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광무개혁으로 식산흥업의 경제정책과 국방강화, 그리고 열강간의 세력균형 유지정책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열강의 압박이 워낙 거센 가운데 각종 개발권을 일본 등 열강에게 넘겨주었다. 특히 일본은 군대 파견을 협박하면서 경부·경인 간선철도를 모두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금광과 어업권 등 각종 이권을 획득하였으며, 약탈적 무역으로 한국의 농어촌 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러시아의 침투를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더니, 1896년 웨베르-고무라 각서를 시작으로 잇달아 러시아와 의정서·협약을 맺고, 1902년 1월 영·일동맹을 맺어 우리나라에 대한 특수권익을 영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 이후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내정간섭을 인정할 것 등을 러시아에 요구하는 협상에 실패하자, 1904년 2월 최후통첩과 함께 인천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을 습격하고, 요동반도의 여순항을 기습 공격하였다.

일본은 러시아를 선제공격하여 전쟁을 도발함과 동시에 우리나라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명문화하기 위해 서울을 점령한 후 한·일의정서[1904. 2]를, 외국인 고문을 두는 등 내정간섭 내용을 담은 한·일협정서[제1차 한·일협약, 1904. 8]를 강제로 맺었다. 그리고 미·일 사이에 이른바 태프트-가쓰라각서[1905. 7]와 제2차 영·일동맹[1905. 8], 이를 총괄한 러·일 간에 포츠머스조약[1905. 9]이 체결되었다.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대한 영·미·러의 승인을 얻은 일본은 제1단계로 한국의 황제를 그대로 두면서 일본의 통감부로 하여금 실권을 장악하게 하는 간접식민지를 만들고자 획책하였다. 이를 위해 일본은 우리나라를 ‘보호국’으로 만든다는 거짓 명분을 내걸었다. 최익현(崔益鉉) 등 유림들이 전국에서 일어나 보호국 음모를 항의하고 나서는 등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총리를 지낸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를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고종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면서 보호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황제와 수상이 끝내 서명에 반대하자 일본군은 1905년 11월 17일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의 직인을 가져다가 날인해 버렸다. 황제의 재가가 없는 이 조약은 당연히 무효였으나 일본은 유효라고 우기고 나섰다. 이 불법적인 조약을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이라 하는데, 실제로는 불법적인 ‘늑약(勒約)’인 것이다. 조약의 불법성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전쟁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安重根) 의사에 의해서 만주 하얼빈에서 총을 맞고 쓰러졌다[1909].

일본의 강도적 만행에 분노한 황제는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전 세계에 발표하고, 이어 1907년 6월에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진천 출신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 3인을 대표로 보내 한국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후 일본은 1907년 7월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케 하였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른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맺고 한국군을 강제 해산시켰으며[1907. 8. 1], 청과는 간도협약[1909]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새 통감으로 임명하고, 군사적 위협으로 항일 언론기관과 애국단체들을 탄압하는 공포 분위기에서,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황제로 하여금 양위조서를 내리도록 강요하는 가운데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을 맺었다. 국권강탈 조약의 서문에는 ‘양국의 상호행복을 증진하여 동양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하여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로부터 35년간에 걸친 독립투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항일의병전쟁과 구국계몽운동]

일제는 한국에서의 경쟁자인 청을 축출한 뒤에 정치·경제·문화적 침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주차조선군을 창설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대한제국을 군사적으로 굴복시켜 끝내는 을사늑약으로 식민지화 절차를 밟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구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고, 아울러 1894~1896년의 의병운동 후에 잠적했던 유림 의병장들이 재기하였으며, 평민 또는 전직 관리 출신 의병장들이 새로 일어나 의병항일전은 전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활빈당 등의 농민조직이 의병으로 전환하였고, 일본군뿐만 아니라 그들의 앞잡이인 일진회와 친일 관리들을 공격하는 의병항일전으로 전환되었다.

1. 진천 의병항일전

진천의 의병항일전도 1896년의 의병 때와 마찬가지로, 진천 지역 의진의 조직과 성격 및 구체적인 활약상을 밝혀주는 자료가 현재까지 없는 상태이다. 의병의 활동자료가 영성한 것은 의병 자신이 기록을 남기려고 하지 않았거나, 수많은 무명의 평민 의병들이 활약했기에 기록할 능력이 없던 탓으로 격하되는 듯한 우려가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다만 1905년 5월 19일에 박재만(朴載萬) 의병장이 70여 의병을 지휘하여 부족한 군수품을 징수하고 일제와 항전하였으며, 1907년 4월에는 의병부대가 진천관아를 공격하여 관아에 비치된 토지 및 가옥증명부가 모두 멸실되었다.

1907년 8월 이후에는 한국군의 강제해산으로 국망을 눈앞에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산군인까지 의병에 참여함으로써 의병항일전의 조직 규모나 전력이 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제 유림·농민·노동·소상인·해산군인, 심지어는 의병에 반대했던 계몽운동가들까지 일어나 의병부대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 규모가 전 국민적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이 시기 진천 지역의 의병항일전은 다른 어느 지역 못지않게 활발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독립적인 진천의병으로서의 조직 규모나 주요 세력 등에 관한 자료의 부족으로 ‘진천의병’에 대한 전말을 밝히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다만 일제 의병자료와 당시 신문 등 1907년 8월부터 1910년 6월까지의 자료를 근거로 진천의병의 항일전을 살펴볼 수 있다.

1907년 11월 30일 충청북도 선유사 이순하(李舜夏)가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에게 보고한 진천의병 관련보고가 있는데, “진천군 주사 박동권(朴東權)의 보고에 의하면 음력 7·8월 두 달 동안 겁탈을 당하지 않는 날이 없고 관사와 민가 50여 호가 전쟁할 때 모두 타버렸으며, 탄환에 맞아 죽은 사람이 5명이며 읍이나 촌에 소동이 일어나 견딜 수 없다.…….”고 나와 있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진천 지역도 의병의 천하가 되었던 것이다. 1907년 11월에는 의병의 활약을 감당하지 못한 일본군 부대가 진천관아를 대부분 소각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퇴각했다. 이 시기 진천 대·소 의병부대의 전투 등 활약상은 모두 87회이고, 응징 의거는 50회이며, 군수품·군자금의 징수 및 징발은 21회, 활약한 총 연인원은 약 4,000여 명, 밝혀진 의병장은 18명[해산군인 5명]이다. 의병 측에서는 전사 61명, 부상 118명, 피체 7명, 귀순 9명이 있었다.

진천 의병항일전의 성격을 보면 첫째, 진천군민의 애국적이며 자생적 평민 의병운동이라는 점이다. 의병부대의 거점·은거, 그리고 이동에 필수조건은 이 지역 출신이 의병부대에 소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정보와 식량 공급에 진천군민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무명의 이 지역 출신 의병장이 부대 지휘에 익숙한 지형을 이용할 수 있었고, 풍찬노숙 등의 일사불란한 작전을 전개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평민 의병부대의 특징이었다.

둘째, 소규모 부대 단위 유격전의 전투양상을 띠었다. 의병의 활약 범위가 진천 내 평야지대와 주변의 차령산맥두타산 등 산악지대를 둘러싼 이웃 군 지역과 연계된 유격전을 전개한 것이다. 셋째,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적과 치열하게 맞서 3년의 장기간 투쟁을 하였다. 화력과 장비가 열세이고 부대 조직이나 전력 또한 정규 정예의 일본군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열악한 조건 아래서 불굴의 의병정신으로 결사 항전하였다. 1907년 10월 8일 이월면 화산당·장양리 및 쌍호 지역 그리고 광혜원 만죽에서의 전투는 진천 의병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볼 수 있다.

일제가 8개 중대의 토벌대를 동원하여 이월면의 화산당·장양·쌍호 등지의 의병부대를 섬멸하고자 했으나 의병들은 저들의 포위망을 분쇄하는 작전에 성공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무려 28명의 희생을 치렀다. 넷째, 진천 의병항일전은 진천군민의 의병정신과 민중적 발전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안으로 일제강점기에 진천 지역 3·1운동의 바탕을 이루었고, 민족의 독립역량을 증대시켰으며 밖으로 국외 무장 독립전쟁의 초석이 되었다.

2. 진천 계몽운동

이 기간의 항일구국 계몽운동은 이상직(李相稷)이 문명학교[지금의 상산초교], 신필균(申必均)·신팔균(申八均) 등의 보명학교[지금의 이월초교], 정운직(鄭雲稷)의 광명학교[지금의 만승초교], 진천성공회의 아동교육[신명학교, 지금의 삼수초교], 그리고 진천감리교회의 야학 운영 등 다양한 근대 민족교육운동으로 일어났다. 또 성공회에서는 애인병원 등의 근대 의료사업을 전개하였다. 1909년에는 신팔균·안희제(安熙濟)·오상근(吳尙根)·서상일(徐相日)·김동삼(金東三) 등이 항일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여 국권 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상설은 일제 황무지개척권 요구 반대상소를 비롯하여 을사늑약 반대운동과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관련하여 간도에 서전서숙, 북만 한흥동과 연해주 등에 한민학교를 세우는 등 근대 민족교육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907년의 헤이그특사의 정사로 활동한 후에 구미 각국과 구국 순방외교를 폈다. 특히 1910년 연해주에서 의병을 통합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펴고자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으며, 국망을 눈앞에 두고 성명회를 조직하고 구미열강 등에 성명회 선언으로 일제의 만행을 성토하였다. 한편 정추택(鄭樞澤)과 이한용(李漢容)은 진천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경제침략에 저항하는 민족 경제운동을 폈다.

[1910년대 민족해방운동]

1. 일제의 무단통치와 경제적 수탈

일본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자 통감부 대신 총독부를 설치하여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자행하였다. 육군대장 출신 총독이 입법·사법·행정 및 군대통솔권을 갖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금지는 물론 민족교육도 금지하는 등 무력통치를 시작하였다. 경제적으로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침탈하고, 광업령·어업령·산림령·회사령 등으로 자원 및 산업을 독점하여, 결국 한국은 국권 상실과 더불어 일본 자본주의 원료 공급지와 상품시장, 그리고 조세수탈의 피해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편 서울과 지방의 문화유적을 파괴하여 우리 민족의 전통과 독립정신을 없애고 일본문화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제강점기 진천군도 헌병경찰제에 따라서 군에 헌병대를, 일부 면에는 헌병분견소를 설치하고 한국인을 헌병보조원으로 채용하여 앞잡이로 삼고, 사법·행정권을 쥐고 군민을 통제하였다. 진천군민의 생활을 크게 바꾼 사건은 토지조사사업이다. 정해진 기간에 절차에 따라 신고하면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 사실을 농민에게 잘 알리지도 않았고, 마을이나 종중 공유지·국유지는 신고주가 없어 총독부 혹은 유력 인사들에게 넘어갔다.

광대한 장양역태랑역의 역둔전과 민유지를 여러 대에 걸쳐 경작권을 갖고 경작해오던 작인(作人)들은 경작지를 빼앗기고 일본인 지주 밑에서 계약 소작인으로 전락하거나 화전민이나 유랑인이 되었다. 진천의 농민들은 일제 침략의 실상을 현실로 경험하였다. 동학농민군과 의병전쟁에서 동포들을 살육하던 침략자의 만행이 상기되면서 이제 항일 기운이 극도로 고조되었다. 3·1운동은 이러한 때 일어났다.

2. 진천 3·1운동

일제의 무단통치에 대항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과 독립만세운동이 서울에서부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진천 출신 조명희(趙明熙)와 홍순복(洪淳福)은 서울에서, 그리고 박승하(朴承夏)는 청주에서 각기 재학 중 독립만세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다. 한편 천도교도인 김교환(金敎煥)은 3월 7, 8일경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와 경고문을 가져와 최봉길(崔鳳吉)에게, 최봉길은 진천읍내의 천도교 신자인 김동한(金東漢)에게 회송하였다. 그리하여 충청북도 진천군에서도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에 걸쳐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진천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4일 저녁에 모의되었다. 문명학교를 세워 배일민족독립사상을 고취해 오던 이상직 등이 장날인 15일 정오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을 세웠다가 진천 헌병대의 급습을 받아 실패했다. 그렇지만 예수교의 전도 부인들이 15일 낮부터 은밀히 각 마을을 순회하면서 만세운동 계획을 알리고 각 마을 단위로 앞산 또는 뒷산에서 횃불을 놓고 만세운동을 전개하도록 계몽하였다.

그리하여 15일 저녁 진천읍과 그 주변의 걸미산·돌고개·도당산·문안산·봉화산 각 산마루에서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씩 분산하여 횃불을 놓으며 봉화 독립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이때 천도교인 박주철(朴柱哲)과 최창기(崔昌基)가 봉화 시위 도중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며칠 뒤 석방된 이상직과 광혜원의 윤병한(尹炳漢) 등은 지난 3월 15일의 만세운동이 계획적으로 거행되지 못한 것을 거울삼아 재차 극비리에 각 읍·면 동지들과 연락하여 온 군민이 4월 2일 일제히 독립만세 시위를 궐기하기로 계획하였다.

진천읍의 만세운동은 3월 15일 저녁 진천읍과 그 주변의 봉화산 등 각 산마루에서 봉화를 올리면서 시작되었다. 4월 2일 이상직의 지휘 아래 오전 8시에 수천 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읍내를 시위행진 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위행렬이 일제 헌병대 앞을 통과하려 할 때 일제 헌병대가 시위행렬에 발포하여 1명이 순국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더욱 기세를 높여 헌병대를 공격하여 헌병대 창벽과 기물을 파괴한 후 자진 해산하였다. 이때 이상직 등 10명이 일제 헌병대에 잡혀갔고, 심지어 진천공립보통학교 학생 유순복(柳順福) 등 10여 명의 어린 학생들도 잡혀가 고초를 당하였다. 또한 장관리의 조태경(趙泰京)은 헌병대에서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돌아와 그 날로 순국하였다.

만세운동은 백곡면으로 이어졌는데, 4월 2일 저녁 장진호(張晉鎬)·최태성(崔泰成)·신영희(申英熙) 등이 주동이 되어 350여 명이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갈월리·양백리·용진을 지나 석현리에 와서 밤을 새웠다. 3일 아침 이장 이원경이 제공한 식사를 하고 신영희의 지휘 아래 전천읍내로 시위행진 할 때 도주하던 백곡면장 남기석(南基錫)을 붙잡아 태극기를 들려 앞장세우고, 백곡면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분견소장이 애걸하면서 시위를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계속 행진하여 사송리까지 진출하였다.

이 급보를 듣고 진천 주둔 헌병 8명이 달려와 사송리 모퉁이에서 행진을 저지하고자 총포로 위협하였다. 이에 신영희 등은 맨손으로 달려들어 현병 1명과 격투를 벌였고, 일본 현병들은 신영희의 등을 총대로 후려치는 등 난타하고 총포를 연발하여 시위 군중들은 부득이 해산하였다. 이때에 체포된 정성호(鄭聖鎬) 등 10명은 3주에서 6개월의 구류 또는 옥고 끝에 풀려났으며 신영희는 1년 6개월 만에 풀려났다.

4월 2일 광혜원에서도 만세운동이 이어졌는데, 윤병한은 정관옥(鄭寬玉) 등과 상의하여 회죽리 일대의 면유림에 식목행사를 한다는 명목 아래 이영호(李榮鎬) 등 동지들을 회죽리 산속으로 집결시켜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오후에 광혜원 장터로 내려오면서 대열을 정비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는데, 참가한 군중은 200여 명에 달하였다. 시위군중의 행렬은 만승면사무소와 신축 중이던 헌병주재소를 습격·파괴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4월 3일 광혜원장날 윤병한 등은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만세시위를 벌여 군중이 2,000여 명이나 참가하였다. 이에 달려온 10여 명의 헌병들은 시위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함으로써 유치선(柳致先) 등 10여 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4월 2일 이월면 장양리에서도 만세시위 군중이 이월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다. 이들은 송림리 이장 신각희(申珏熙)를 방문하여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을 뿐 아니라, 이장은 오히려 만세운동을 제지하였다. 오후 10시경에는 송림리 뿐만 아니라 중산리·노은리 외에도 2~3개 이민들이 화톳불을 지르고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1919년 3월 15일 시작된 진천읍 만세독립운동은 4월 2일에 진천군 각 면으로 확산되었고, 군민들의 저항이 격렬하였다. 이에 출동한 일제 헌병대는 평화시위 군중을 무차별 발포하여 수십 명의 순국인사와 부상자를 냈다. 4월 4일부터는 일제 현병들이 총출동하여 만세운동자 수십 명을 검거·투옥하고 악랄한 고문을 자행하였다.

1919년 진천 지역의 3·1운동은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독립운동으로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진천군민의 희생과 노력을 보여준 것이었다. 봉화 만세운동에서 비롯한 이 운동은 충청북도에서의 3·1만세운동으로 최초일 뿐만 아니라 봉화만세시위운동으로서도 최초인 것이다. 그리고 초기부터 비교적 격렬하였으므로 순국 희생자가 많았다.

[1920년대 민족해방운동]

1. 일제의 기만적 문화통치와 경제수탈

3·1운동으로 우리 민족의 강인한 독립의지를 알게 된 일제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내걸었다. 그러나 ‘문화통치’는 우리민족을 기만하면서 민족분열을 부추기기 위한 고도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1914년 3월에는 전국의 행정구역 부·군·면을 우리의 전통을 무시하고 통폐합하였다. 진천군은 종래의 15개 면이 7개로 줄어들었다. 남변면·북변면·행정면·서암면을 읍내와 묶어서 군중면[1917년에 진천면, 1974년에 진천읍]으로, 만승면은 죽산의 일부를 합쳤으며, 덕문·방동·산정·소답면의 4개 면을 합쳐 덕산면으로, 문방면과 백락면은 문백면으로 합쳤다.

이곡면과 월촌면은 이월면이 되었고, 초평면백곡면은 그대로 두었다. 면뿐만 아니라 마을들도 합치고 또 새 이름을 붙여 행정 마을로 지정했다. 1920년대에 일본은 산미증식계획을 표방했지만, 쌀 생산량보다 일본으로의 수출량이 약 8배 증가하였다. 밭보다 논이 많은 진천사람들은 과중한 소작료·지세·수리조합비·비료대금 등으로 날로 빈궁해졌다.

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국외 독립군· 광복군의 무장투쟁

3·1운동의 결실로 1919년 4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다양한 독립운동이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만주와 연해주에는 30여 개의 독립군부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 부근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전과를 올린 것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였다. 독립군 부대와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한 일본군은 간도 지방의 교포들에게 잔악한 학살을 감행하였다.

이후 독립군부대들은 소련에서 자유시참변의 비극을 겪었고, 다시 만주를 중심으로 국민부[1929]와 혁신의회[1930]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국민부·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당·한국독립군은 각기 남만·북만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세계경제공황을 돌파하는 방법으로 군사 파시즘 정책을 강화해 만주를 완전히 점령, 괴뢰 만주국을 수립하였다. 1937년에는 중국을, 1941년에는 미국 하와이를 공격해 이른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일제는 한국을 병참기지화하고 수탈정책을 강화해 한국인의 삶을 파탄케 하였으며, 우리민족을 일본 국민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발악적으로 추진하였다. 우리민족은 이에 대항하여 민족문화수호운동을 꾸준히 추진하고, 좌우합작 등 민족연합전선과 항일무장투쟁을 강화해 나갔다.

이 시기에 진천 지방의 독립운동은 다음과 같다. 1920년대 신팔균은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으며 청산리대첩 이후 1924년 대한통의부의 군사위원장 겸 의용군총사령관으로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순국하였다. 그의 부인 임수명(任壽命)도 통의부단원으로 활동하다가 남편 신팔균의 순국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전참판 홍승헌(洪承憲)·홍경식(洪景植) 부자와 전참판 정원하(鄭元夏)는 서간도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홍경식은 3·1운동 후에 한족회 간부로서 광복운동을 도모하다가 서울에서 일제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서울에서 3·1운동에 참가했던 조명희는 1925년 전후하여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를 조직하여 중앙위원으로 항일민족해방운동을 하였다.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해서는 조선사범학교 교수, 소련작가동맹 맹원, 『선봉』의 주필 등으로 민족교육과 민족문화수호운동을 전개하였다가 1937년 소련 정부에 투옥· 숙청되었다.

1930년 1월 광주학생운동이 서울까지 전개되자 진천 출신인 채수복(蔡洙福)은 협성실업학교 학생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옥중 순국하였다. 박기성(朴基成)은 중국에서 무정부주의자 연맹인 남화한인청년연맹[1931]·조선혁명자연맹[1937]을 조직하였으며, 1938년에는 한국전지공작대를 창립하여 간부로 활약하였다. 1941년 한국광복군 제5지대의 분대장으로서, 이후에는 총사령부에 전입되어 8·15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유재복(柳在福)오상근은 일제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호남성 지역에서 참전하고 있다가, 인근에 한국광복군이 활동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1944년 1월에 탈출하여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중경의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 배속되어 정부요인들의 신변보호와 그 가족들의 경호를 맡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