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3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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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집필자 | 박상일 |
[정의]
충청북도 진천 지역에 군사상의 목적으로 흙이나 돌로 구축한 방어 시설.
[개설]
성(城)이란 보통 성벽(城壁)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넓다. 처음에는 흙을 파서 도랑을 만들거나 흙으로 쌓았으나 사람들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나무로 만든 목책(木柵)과 돌로 쌓은 석축(石築), 벽돌로 쌓은 전축(磚築)이 생겼다. 전형적인 성곽은 네모꼴로 쌓은 성과 다시 그 바깥에 네모꼴로 쌓은 곽(郭)으로 구성되는 이중의 벽으로 구성된다. 안쪽의 것을 성, 또는 내성(內城)이라 하고, 바깥쪽의 것을 곽(郭) 혹은 외성(外城)이라고 한다. 삼중인 경우에는 맨 안쪽을 내성, 다음을 중성(中城), 바깥을 외성이라고 하며, 만약 도성(都城)이면 왕성(王城)·궁성(宮城)·황성(皇城)이라 부르고, 그 바깥쪽의 것은 나성(羅城)이라 부른다.
성은 외적의 침입이나 자연적인 재해로부터 성안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인위적 시설을 말하는 총체적인 개념이다. 지형적인 조건과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여러 가지 모양의 성곽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산지가 많아 특히 산성(山城)이 발달하였으며, 네모꼴보다는 자연적인 포곡선(包谷線)을 형성하여 부정원형(不整圓形)이 많다.
옛말에 성(城)을 ‘잣’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성이 중국 계통이 아님을 알려 주는 것이다. 대체로 청동기시대에는 신전(神殿)이 나타나거나 신성구역(神聖區域)이 있는데, 이때 신전을 포함하여 지배자의 거주지를 둘러싼 성이 등장한다. 이때의 성곽은 집락(集落)의 형성과 지배자에 의한 노동력의 징발, 곧 정치집단의 발생을 전제로 하므로 국가의 기원과 연계된다. 고전적 성곽 발생 이론에 따르면, 농경집단이 유목집단의 약탈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성곽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넓은 농경지를 가진 배후의 낮은 구릉 위에 쌓은 성곽들을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남부 시베리아 지방에서 만주 지방에 걸치는 도피용(逃避用) 목책[Gorodisthche]과 관련되며, 일찍부터 방어용인 산성 위주의 성곽이 많이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종류]
우리나라의 성곽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성곽의 형태로 보면 평면의 모양에 따라 네모꼴, 둥근꼴, 반달꼴, 기다란 꼴로 구분할 수 있다. 둘째, 성곽이 축조된 위치에 따라 평지성, 낮은 산성, 높은 산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셋째 성곽을 축조한 목적과 기능에 따라서는 왕궁과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도성(都城), 지방의 행정·경제·군사의 중심지인 읍성(邑城), 유사시에 대비하여 방어용·도피용으로 쌓은 산성(山城), 창고를 보호하기 위한 창성(倉城), 군사적 요충지에 쌓고 군인이 주둔하던 진보(鎭堡), 왕이 행차할 때 일시 머물기 위한 행재성(行在城), 국경과 요새지에 쌓은 행성(行城)[일명 장성(長城)]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넷째, 축조에 사용된 재료에 따라서 토성(土城)[흙으로 쌓되 판축(版築)한 것]·토축성[흙으로 쌓되 삭토(削土) 등의 방법으로 쌓은 성]·석축성[돌로 쌓은 것으로 자연할석축(自然割石築)과 무사석축(武砂石築)이 있다]·벽돌성[벽돌로 쌓은 것인데 우리나라에는 전체를 벽돌로 쌓은 것은 없고 일부만 벽돌로 쌓았다]·목책[나무로 세운 것]·목익(木杙)[녹각성(鹿角城)이라고도 하며 목책과 달리 가지 부분까지 이용하여 세운 것]·목책도니성(木柵塗泥城)[목책이나 목익 진흙을 발라 마치 담장처럼 만든 것] 등이 있다.
성곽은 성벽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시설을 포함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성곽에는 우선 성벽과 성황(城隍)[해자(垓字) 혹은 참호(塹濠) 혹은 구(溝), 해자(海子)]이 있고, 성문(城門)과 여장(女墻), 그리고 타첩(垜堞)·옹성(壅城)[혹은 옹성(甕城)]·곡성(曲城)·치성(雉城)·성우(城隅)·암문(暗門)·수구문(水口門) 등이 있다.
충청북도 진천군은 고대시대부터 전략적·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기에 토성과 석성이 많이 남아 있다. 토성으로는 대모산성·걸미산성·환희산성·국사봉산성·갈월리산성 등이 있으며, 석성은 도당산성·이을산성·태령산성·문안산성·두타산성 등이 있다.
[특징]
우리나라의 성곽은 평면 구성이 중국의 방형(方形)이나 중세 서양의 별모양[星形]과 같이 일정한 형태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복잡한 평면을 이룬다. 따라서 성곽은 여러 개의 계곡을 둘러싸고 설치되기도 하고 산등성이의 구불거리는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기도 한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지형이 산지가 많으므로 이 산지를 그대로 이용하며, 축성에 필요한 각종 재료도 근처 산의 돌을 깨어 이용하거나, 돌이 없는 산은 흙을 깎아 성벽을 구성하였다.
한편, 적의 침입 때 산성에 들어가 지키는 전통적인 전술 때문에 따로 부대시설을 갖추지 않고 적당한 지형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옹성·치성·망루 등의 시설을 따로 축조할 필요가 없어 축조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성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축성 재료는 돌이다. 중국의 성이 주로 판축의 토성으로 축조되었다면 우리나라의 성은 주로 내탁(內托)의 석성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자연할석의 평평한 한쪽 면을 성벽의 바깥부분으로 맞대어 쌓고, 그 안쪽에 석재를 뗄 때 생긴 부스러기를 넣으며, 다시 그 안쪽에 흙과 잡석을 채우는 내탁의 방법은 작업의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이었다. 이는 성을 부수는 무기인 충차(衝車)가 산의 험한 지형을 올라오기 어려운 점을 충분히 이용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산성의 축성 기술은 산비탈을 적절히 이용하되 자연적인 경사면을 더욱 경사지게 하여 성벽으로 이용하는 삭토법도 발전하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성들은 평지의 경우에는 물을 이용한 천연의 저지선을 만들었고, 산성의 경우는 규봉(窺峯)[넘겨다보는 산]을 피하여 위에서 공격을 못하도록 위치 선정을 하고 있다. 평지성의 경우는 대개 앞에는 물이 좌우에서 합쳐져 자연적 참호를 이루게 하고, 뒤에는 험준한 산에 의지하도록 하여 방어력을 자연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이러한 위치 선정은 사람의 힘을 가장 덜 들이고 적을 방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형의 유리함을 최대한 활용했다고 하였다.
대개 물을 이용한 천연 장벽을 가진 평지성은 배후의 산에 산성을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성곽의 배치 상태는 이른바 기각(掎角)[앞뒤에서 서로 호응하여 적을 몰아치는 것]의 형태를 이루는데, 이것이 더욱 큰 규모의 지역에 적용되면 산성들 사이에 기각지세(掎角之勢)가 이루어진다. 우리나라 산성의 대부분은 이 기각지세에 해당하여 하나의 단위 성곽이 적의 공격 목표가 되면, 다른 성들이 적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우리나라 성곽의 구조상 특징은 부대시설을 배치하는 데 산의 능선을 최대로 활용한 점이다. 우선 수문과 성문을 계곡의 중앙과 그 좌우에 설치하여 통행을 편리하게 하였으며, S자형으로 굽어 드나들도록 하고 있다. 반면 암문은 산등성이로 통하는 능선부의 바로 아래 비탈진 부분을 이용하여 설치하였다. 치성은 산성의 경우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성벽이 곧게 뻗은 곳에서 산등성이 쪽에 배치하였으며 대부분 곡성을 이룬다.
옹성은 가파른 계곡 경사면일 경우 대부분 곡성으로 대치되며, 대지일 경우 ㄱ자형으로 되어 있다. 망루는 가장 높은 정상부, 혹은 산등성이와 연결되는 각부(角部)에 위치한다. 성내의 가장 낮은 부분에 연못이나 샘이 있으며, 대부분의 연못은 방형(方形) 혹은 원형으로 단을 두고 깊게 축조하여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도록 하고 있다. 여장은 평사(平射)보다는 내려다보고 쏘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 높지 않다.
진천 지역의 성곽 가운데는 특히 대모산성과 도당산성이 진천군의 고대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며, 앞으로 발굴조사 등의 학술조사가 필요하다. 시대적으로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이 가장 많고, 도당산성 등 일부는 고려시대에도 이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진천 지역에 읍성이나 산성이 축조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