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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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蓮谷理寺址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5-1|485-4[김유신길 641]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박상일 |
성격 | 절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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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고려시대 |
소재지 주소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5-1|연곡리 485-4[김유신길 641]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위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비선골마을의 만뢰산(萬賴山) 남쪽 기슭에 있다. 지금은 보탑사(寶塔寺)가 들어섰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연곡리 절터에 대한 고문헌 기록이 없고, 비문이 전혀 새겨지지 않은 고려 전기의 석비인 보물 제404호 진천 연곡리 석비(鎭川蓮谷里石碑)가 남아 있어 일찍부터 눈길을 끈 곳이다. 석비에 명문이 없어 사지의 이름과 내력을 알 수 없으나 석비는 일찍부터 진천의 고적으로 잘 알려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석비에 대하여 『상산지(常山誌)』에 “비선동은 삼한 고찰의 옛터로 마을 북쪽에는 석불이 있고 서쪽에는 석비가 있는데 비의 높이는 수장이고, 너비는 수척, 두께는 1척으로 돌이 수정과 같아 사람의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있을 정도이며, 글씨를 새긴 흔적이 없고 손으로 두드리면 동동거리는 북소리가 난다. 비의 머리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두고 싸우는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로써 이 마을을 구룡이라고도 부른다. 생각하건대 고찰이 세워진 지 오래되어 이끼가 글씨를 메우고 뼈대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영길이 이 비를 보고 지은 시가 기록으로 전하며, 시인 이은상도 『가을을 안고』라는 충청북도 지역 기행문에서 이 비에 대한 시를 남겼다.
[현황]
절터의 규모는 약 6,611.57㎡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절터에서 발견된 진천 연곡리 석비, 연곡리 절터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연곡리 삼층석탑 등의 조형 양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절터로 여겨진다. 절터 대부분이 집터와 경작지로 이용되다가 근래에 보탑사가 건립되어 원형을 찾을 수 없는 상태이며 건물지의 위치도 확인할 수 없다. 보탑사 주변과 뒤쪽 넓은 터에서는 많은 기와 조각을 확인할 수 있어 어느 정도 절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지금까지 절터에 대한 발굴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보탑사가 신축되어 많은 유구가 훼손되었으리라고 여겨진다. 향후 발굴 조사를 비롯한 정식 학술 조사를 실시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