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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1712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2[이상설안길 10]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연승

[개설]

이상설(李相卨)은 1870년 음력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아버지 이행우(李行雨)와 어머니 벽진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순오(舜五), 호는 부재(溥齋)이다. 고려 말 대학자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23대손이다.

[풍찬노숙하며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삶]

이상설은 1876년 6세 때 승정원동부승지 이용우(李龍雨)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온 뒤 이제촌(李濟村)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6세 무렵에는 박의암(朴毅菴)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4년(고종 31)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1896년 성균관교수가 되고 탁지부재무관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그 후 시대적 변화에 따라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범세(李範世)·여규형(呂圭亨)·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 등과 매일 만나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이 무렵부터 미국 선교사인 헐버트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와 프랑스어를 익혔다.

기록에 따르면 1904년(고종 41) 1월 종이품인 궁내부특진관에서 해임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그동안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실직에는 나아가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고종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후일 이상설이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정사로 파견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904년 보안회(保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여 배일 운동과 민족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고, 1905년 의정부참찬에 발탁되었다. 그해 11월 7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강제로 주최한 대신회의에서 이완용(李完用)·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이근택(李根澤)·권중현(權重顯) 등 이른바 을사오적의 찬성을 얻어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상설은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대신회의의 실무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이 고종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늑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하는 한편, 조병세(趙秉世)·민영환(閔泳煥)·심상훈(沈相薰) 등 원로대신을 필두로 백관의 반대 상소와 복합 항쟁(伏閤抗爭)을 벌이도록 주선하였고,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민중들에게 민족 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고종 43) 4월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해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과 함께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하여 8월경 항일 민족 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우고 신학문과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고종의 밀서를 받고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과 함께 정사로 파견되었으나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권 협상과 일본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 일로 고종은 폐위되고, 이상설은 일본의 재판에 회부되어 궐석 판결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귀국을 포기한 이상설은 세계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영세 중립화를 역설하기도 하였다.

1909년(순종 3) 국민회(國民會) 중심의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이위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승희(李承熙)·김학만(金學萬)·정순만 등을 규합해 러시아와 만주 국경 지방에 한인을 이주시키고 연해주에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였다.

이 무렵 연해주 지역 한인은 20여 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니콜리스크 등 연해주 각지에 정착하여 한인 사회를 형성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한인들이 살았던 블라디보스토크에 형성된 신한촌은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0년 6월 이상설은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좀 더 효과적으로 항일전을 벌이기 위해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이남기(李南基) 등과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다. 7월에는 유인석과 상의하여 서상진(徐相津)을 본국에 보내 고종의 아령파천(俄領播遷)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망명 정부 수립을 시도하였으나 8월에 일제가 강압적으로 제1차 한일협약을 맺어 국권을 강탈함으로써 뜻을 이루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이상설과 십삼도의군의 중심인물들은 조약 무효를 선언하고자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독립의 비장한 결의를 담은 「성명회 취지문」을 발표하고 「성명회 취지문」과 각종 격문을 중국·러시아에 있는 한인들에게 널리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성명회가 활발한 활동을 펼치자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 강력히 항의하고 중심인물인 이상설·유인석·이범윤의 체포와 인도를 요구하였다. 이에 이상설은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어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1911년 이상설은 연해주 지역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조직한 권업회(勸業會)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한인 교포의 경제 향상과 항일 독립운동에 주력하는 한편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간을 맡기도 하였다.

권업회는 표면적으로 상공업 등의 실업 활동을 권장하는 한편 민족 교육과 한인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실제 활동 목표는 독립을 구현하는 데 두고 비밀리에 광복군 양성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1913년 당시 동북 만주 나자구(羅子溝)에서 권업회의 중요 임원인 이종호(李鍾浩)·이동휘(李東徽)·김립(金立)·장기영(張基永)·김하석(金河錫)·오영석(吳永錫) 등이 사관학교인 대전학교(大甸學校)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일제가 압수한 「각처군용정세상세(各處軍容情勢詳細)」에 “블라디보스토크의 사범학교 공지(空地)에서 총기를 소지하여 훈련받은 병력이 29,365명이고, 그 밖에 총기 13,000정과 탄약 50만을 수장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면서 권업회 의장인 이상설이 이 계획을 주관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어 권업회의 광복군 양성 활동은 이상설이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14년 이동휘·이동녕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에 있는 동지를 모아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고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권업회가 양성한 광복군을 기반으로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독립 전쟁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러시아는 권업회가 발행하던 『권업신문』을 정간시키는 등 한인의 정치·사회 활동을 엄금했고,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의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하였다. 이로써 대한광복군정부는 건립 직후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조직을 유지하거나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한 채 사실상 해체되고 말았다.

1915년 권업회가 해산된 뒤 중국 상하이로 간 이상설은 상하이 지역의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 베이징 지역의 유동열(柳東說)·성낙형(成樂馨), 그 밖의 지역의 이춘일(李春日)·유홍열(劉鴻烈) 등과 합세하여 3월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결성하고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본부는 북경 서단패루(西單牌樓) 김자순(金子順)의 집에 설치하고 재정부·교통부·외교부를 두었다. 지부에는 지부장을 두고 중국과 국내의 주요 지역에 당원을 파견하여 재정, 통신 연락 및 당원 모집 등 주된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전력을 다하던 이상설은 건강을 해쳐 1916년 초부터 하바롭스크에서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차도가 없자 날씨가 따뜻한 니콜리스크로 옮겨 요양을 하였으나, 1917년 3월 2일 조국 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47세의 나이로 이국땅에서 순국하였다.

이상설은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임종을 지킨 이동녕백순(白純), 조완구(趙琬九), 이민복(李敏馥) 등은 이상설의 유언에 따라 아무르 강가에서 화장하고 그 재를 북해 바다에 뿌렸다. 이때 이상설의 시문을 엮은 원고와 유품도 거두어 모두 불태웠다고 전한다.

1962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도 해방된 조국을 보지도 못하고 이국에서 세상을 떠난 보재 이상설의 독립 활동을 알리고 공훈을 길이 기억하기 위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평생을 조국에 헌신한 이상설의 위패를 모신 숭렬사]

숭렬사(崇烈祠)이상설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자 1972년 진천읍 산척리 134-2번지[이상설안길 10]에 세운 사당이다. 중부고속도로 진천나들목에서 좌회전한 뒤 증평 방향으로 다시 좌회전하여 국도 21호선을 따라 3㎞쯤 가면 왼쪽으로 이정표가 보이고, 여기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2㎞쯤 가면 있다.

버스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진천에서 초평 방면으로 국도 34호선을 따라 약 3㎞쯤 가면 도로 왼쪽에 ‘이상설생가 입구’라는 푯말이 나온다. 이곳에서 내려 포장도로를 따라 2㎞쯤 가면 있다. 자가용을 이용할 때는 진천에서 증평[초평] 방면으로 약 3㎞ 가서 왼쪽으로 2㎞ 가면 된다.

경내에 숭모비와 동상 등이 있고, 사당 옆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77호인 이상설 생가와 묘소가 있다. 생가는 1988년 12월에 복원하였다가 원형과 다름이 있어 1998년 해체하여 복원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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