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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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신진혜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태어나고 활동한 조선 후기의 문인 학자.
[개설]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경학, 예학과 경세학 등에 걸쳐 방대한 저술을 남긴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193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조선학운동’이 발생하고 실학 연구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이때 정약용은 대표적인 조선의 실학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정약용과 정약용의 저술은 일찍이 실학적 측면에서 주목받았지만, 최근에는 조선 사회와 정약용의 개연성에 주목하거나, 여러 조선 유학자들이나 청나라와 일본의 학자들의 저술과 정약용 학문과의 관련성에 주목하는 연구가 진행되면서 정약용에 대한 이해 폭이 확장되고 있다.
[정약용의 생애]
정약용의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1762년(영조 38)에 아버지 정재원(丁載遠)과 둘째 부인 해남 윤씨 사이에서 4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정약현(丁若鉉), 정약전(丁若銓), 정약종(丁若鍾)이 있다. 정약용은 어린 시절에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편찬했다.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은 정약용의 오른쪽 눈썹에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삼미(三眉)’라 불린 이유로, ‘삼미집’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김호석 화백의 작품인 정약용 초상에서 눈썹이 셋으로 나뉜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바 있다.
정약용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다. 과거에는 소내(苕川) 혹은 두릉(杜陵)이라고 하였는데 정약용의 5대조부터 터전을 두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약용과 부인 풍산 홍씨의 합장묘 역시 여유당 뒷산에 있다. 현재 정약용 유적지 인근에 실학박물관도 자리하고 있어 전시를 통해 실학의 형성 과정과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을 확인할 수 있다.
정약용은 아버지 정재원의 부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를 따라다니며 경사(經史)를 배웠으며, 10대 중반 무렵 매부 이승훈(李承薰)과 큰형의 처남인 이벽(李蘗), 그리고 이승훈의 외삼촌인 이가환(李家煥)과 교유하면서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학문을 접했다. 178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789년에 식년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희릉직장을 시작으로 예문관검열,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홍문관수찬, 경기암행어사, 사간원사간, 동부승지·좌부승지, 곡산부사, 병조참지, 부호군, 형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789년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설치하는 공사가 있었는데, 정약용이 공사의 규제(規制)를 만들었다. 1792년에는 수원성의 규제를 올렸고,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만들어 4만 냥을 절약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정약용은 이벽·이승훈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입교하였는데, 교회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입교 자체만으로 문제가 되었다. 정약용은 천주교 신앙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렸고, 천주교와 무관함을 스스로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주변 인물들이 화를 당하고 형 정약종도 참수되었던 상황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정약용은 1801년 2월에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정약용의 조카 사위인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帛書事件] 여파로 다시 투옥되었다가 11월에 강진현(康津縣)으로 유배되었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 기간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학문 연구에 매진했는데, 정약용의 18년간의 강진 유배 시기는 이른바 ‘다산학단’의 형성 시기였다고도 볼 수 있다. 다산학단은 정약용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거나 가르침을 받은 인사들로 다산 학문의 형성과 계승, 발전에 기여한 학자 집단을 의미한다. 정약용의 저작 활동은 대부분 유배기에 이루어졌고, 유배 시기에 인연을 맺은 제자들이 저작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을 통해 유배 시기 동안 제자들이 정약용의 저술 활동을 보조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온 것은 1818년 가을, 나이 57세 때였다. 57세에 해배되어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고향인 마현에서 자신의 학문을 마무리하였다. 정약용이 생전에 자신의 저술을 정리한 묘지명인 『자찬묘지명(自撰墓地銘)』과 현손인 정규영이 편찬한 『사암선생연보(俟巖先生年譜)』를 통해 정약용의 생애와 학문 활동의 행보를 확인할 수 있다.
[정약용 저술의 구성]
정약용은 일표이서(一表二書)를 남긴 경세가이자,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서를 남긴 경학자이며, 방대한 예서(禮書)를 남긴 예학자이다. 정약용의 저술은 여러 판본의 필사본 형태로 전해져 오다가 정인보·안재홍이 1936년 ‘다산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154권 76책으로 찬집(纂集)하여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2013년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기존 『여유당전서』의 오자와 탈자를 바로잡고, 새로 발굴된 다산의 저작을 포함시키고 교감과 표점을 거쳐 『정본 여유당전서』를 발간함으로써 여러 판본으로 전해지던 『여유당전서』를 다시금 정리하였다. 정약용은 유교 경전의 뜻을 해석하거나 분석하는 경학(經學), 예에 관한 예학(禮學), 국가나 사회를 경영하기 위해 제시되는 경세학(經世學), 그 외에도 『마과회통』과 같이 의학에 관한 저술이나 『풍수집의』와 같이 풍수학과 관련된 저술에 이르기까지 넓은 분야에 거쳐 저술을 남겼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자신의 학문 체계에 대해 “육경사서로 수기(修己)하고 일표이서로 천하 국가를 다스리니 본말을 갖추었다.”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정약용의 경학이 경세학과 단절되어 연구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정약용의 경학 연구는 육경사서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선행 연구에서 정약용의 경학 연구는 육경(六經)[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악기(樂記)·역경(易經)·춘추(春秋)]→사서(四書)[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소학(小學)·심경(心經)의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시기적으로는 1812년경에 육경 연구가 대략 마무리되고, 1813~1814년 사이에 사서에 관한 저술이 진행되었으며, 1815년에 경학 연구 전반이 일차적으로 마무리가 되었다고 정리한 바 있다.
정약용의 예학은 경학과 마찬가지로 정약용의 학문 분야에서 중요한 축을 형성한다. 정약용은 자신이 저술한 책 중에서 『주역사전(周易四箋)』과 『상례사전(喪禮四箋)』만이라도 전승해 간다면, 나머지 책들은 그냥 없애 버려도 좋겠다고 말하며 두 저술이 자신의 역작임을 강조하였다. 정약용은 가례(家禮)와 관련하여 『상례사전』 16권, 『상례외편(喪禮外篇)』 4권, 『상의절요(喪儀節要)』·『제례고정(祭禮考定)』 2권, 『가례작의(家禮酌儀)』·『예의문답(禮疑問答)』 1권, 『풍수집의(豊水集議)』 1권의 저술을 남겼으며 국가 의례에 대해서는 『춘추고징(春秋考徵)』 4권을 저술하였다.
정약용의 경세학 관련 저서로는 『경세유표(經世遺表)』[1817]와 『목민심서(牧民心書)』[1818], 그리고 『흠흠신서(欽欽新書)』[1819]가 있으며, 이는 1표 2서라 불리기도 한다. 『경세유표』의 원제목은 ‘방례초본(邦禮草本)’으로 1817년(순조 17)에 저술되었는데 미완성작으로 남았다. 『경세유표』는 조선 정부의 행정 기구 개편을 비롯하여 관제와 토지제도, 부세제도 등의 개혁 원리를 제시하였다. 정약용은 방례초본인(邦禮草本引)에서 『경세유표』의 저술 의도를 밝히면서 “터럭만큼도 병통이 아닌 것이 없는 바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하여 근본적인 개혁을 통해서만 국가와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목민심서』는 조선 후기 지방사회의 실제를 민생 문제 및 수령의 업무와 결부시켜 소상하게 밝히면서 수령의 실제적 업무 요령을 제시하였다. 『목민심서』는 48권 16책의 방대한 저작으로, 부임(赴任)부터 율기(律己)·봉공(奉公)·애민(愛民)·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典)·진황(賑荒)·해관(解官) 등 모두 12부로 구성되어 있다. 『흠흠신서』는 정약용이 경험과 분석을 바탕으로 저술한 형법서로, 조선 시대 대표적인 판례집이자 형법학과 수사학의 지침서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종합적인 법률 서적이라 할 수 있다.
정약용의 학문이 형성됨에 있어서 조선 후기 학자들은 물론 청·일본 학자들의 영향이 있었다. 가족인 정약전이나 윤두서, 그리고 성호 이익 계열의 이벽과 권철신으로부터 받은 영향뿐만 아니라 초계문신으로 있을 당시 정조의 영향, 19세기 초 중앙 정계의 학자들인 홍석주나 김매순, 신작과의 소통에 대해서는 일찍이 학계에서 주목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약용은 청나라 시대에 발달했던 고증학적 학술 방식의 영향을 받은 바 있으며, 명나라와 청나라 유학자들인 황종희, 고염무, 염약거, 모기령, 서건학 등의 서적을 섭렵하면서 자신의 저술에 섭렵한 청나라 유학자들의 의견을 비판적으로 반영하였고, 일본 고학파인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등의 연구 역시 섭렵하고 있었다.
[실학 연구의 흐름과 '실학자' 정약용]
‘실학’은 조선 후기의 사회, 경제, 정치적인 측면에서 당면한 현실 문제를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학풍에서 벗어나서 실제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의 결과로 등장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실학파’는 공리공담에 치우쳐 있었던 이전의 성리학자와는 달리 ‘탈주자학적’이었다고 정리하면서 구분지었다. 조선 후기 사상계의 새로운 흐름이라 여겨졌던 ‘실학(實學)’ 개념은 주자학과 대립되거나 때로는 반대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주자학은 현실과 유리된 관념론이자 “공리공담(空理空談)으로서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라고 비판받았던 반면에 ‘실학’은 지배층에 의해 밀려난 재야(在野) 지식인들이 현실을 직접 체험하며 현실 문제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 실용적 학문으로써, ‘실증적·민족적·근대지향적 특성을 지닌 학문’으로 규정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채 일제의 지배를 받던 암울한 시기의 역사학자들은 조선의 역사 속에서 망국의 원인을 찾고, 그 이면에서 희망을 찾아보고자 했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 등장한 학풍 가운데 역사학자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한 특정한 학풍을 부각시켜 ‘실학’이라 지칭하고 ‘실학 사상’의 계승을 통해 현실의 난국에 대처할 것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김현영은 실학 연구가 이어진 시기를 분절하여, 1930~1940년대 실학 연구의 시작, 1950~1960년대 실학 연구의 발전, 1970~1980년대 실학 연구의 심화 시기로 나누어 제시한 바 있다.
정약용이 실학자로서 조명받았던 것은 1930~1940년대 실학 연구의 시작 시기와도 맞물린다. 실학 연구는 193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발생한 ‘조선학운동’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를 통해 실학 연구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일제의 식민 시기라는 당시의 상황과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실학 연구가 전개되었고, 이를 통해 ‘실학’이라는 역사적 개념이 정립되었다. 처음으로 조선 후기 실학의 체계를 세운 것은 정인보였으며, 실학 연구에 있어 특히 다산 정약용 연구의 경우는 안재홍과 정인보가 신조선사를 통해 간행한 『여유당전서』로 더욱 부각되었다.
실학 연구의 발전이 있었던 1950~1960년대의 경우는 해방 전의 실학 연구를 계승한 형태로 이어졌다. 천관우에 의해 실학의 발전 과정은 준비-맹아-전성기로 나뉘고, 실학의 특징은 자유성, 현실성, 과학성으로 규정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내재적 발전의 입장에 선 여러 사회경제사적 연구에 힘입어 실학 연구가 진전되었는데, 사회경제사 연구 성과를 수용하여 실학의 성격을 규정하고, 실학자 개개인의 연구를 통해 사회경제적 면모를 이해하려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우근에 의해 ‘실학’ 개념에 대한 논쟁이 유발되었다. 유교나 성리학 등은 불교 등의 여타 학문과 구분되게 스스로의 학문을 ‘실학’이라 지칭한 바 있다는 점을 들어 ‘실학’이라는 용어가 조선 후기의 특정 학문적 조류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어려우니, 조선 후기의 새로운 학문 경향을 경세학이라 부를 것을 제안하였다. 전해종 역시 ‘실학’이라는 용어가 중국에서도 사용된 용례가 있으니 조선 후기의 새로운 학풍에 대해서만 ‘실학’이라 지칭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1970~1980년대에는 실학 연구가 양적으로 증가하였고, ‘실학자’ 개개인에 대한 연구가 더욱 진척되었으나 실학과 실학자의 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후대 연구자들은 과연 실학자의 공통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실학이 봉건 유교 사상인 주자학을 벗어난 것이 아니고 봉건 제도와 양반 신분 제도의 특권을 영구히 보전하려는 입장에서 나온 개혁 사상이라는 연구나, 실학의 토지 개혁 사상을 진보적인 성향으로 파악하고 이를 통해 근대 농민 사상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엿본 연구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도였다. 이 시기에는 다산학회, 다산연구회에 의해 정약용의 문집 일부 번역 및 간행이 이루어지는 발전이 있었다.
1990년대 이후 현대에 이르는 시기에는 정약용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척을 이루었다. 정약용 저술 체계 전반에서 정약용이 파악한 조선 후기의 시대상과 문제 인식을 조망하는 것으로 시야를 확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약용 개인에 대한 연구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사상계의 흐름 가운데 조선 후기 사상계가 어떠한 조류를 형성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실학’은 어려운 상황에서 희망과 가능성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 줄 만한 연구 주제로 주목받았고, 그 중심에 정약용이 있었다. 정약용에 관련한 연구, 이른바 ‘다산학’은 동아시아 사회가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과 연관되어 연구되었다. 이는 동아시아사를 바탕으로 미래를 향한 어떤 전망을 가지고 실현할 바탕을 마련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깔려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의식을 제기하면서 방대한 저술을 남긴 정약용으로부터 무엇을 읽어 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끝없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