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0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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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頭陀山 |
이칭/별칭 | 관동의 금강산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강원도 삼척시 미로면|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
집필자 | 김창환 |
전구간 | 두타산 -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강원도 삼척시 미로면|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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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산 |
높이 | 1357m |
[정의]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미로면 그리고 동해시 삼화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
[개설]
두타산은 해발고도 1357m의 산으로 예부터 강원도영동 남부의 영적인 모산으로 숭상되어 왔다. 두타산은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저술한 곳이며, 두타산성 등의 역사적 유물도 산재한다. 무릉계곡과 쉰움산의 오십정 등 지형 경관이 아름답다.
[명칭 유래]
두타산의 두타(頭陀)는 산스크리트어의 두타(Dhuta)를 이두식으로 한자화한 것이다. 두타(Dhuta)에는 “의식주에 대한 탐욕과 세상의 모든 번뇌와 망상을 버리고 수행·정진한다.”는 불교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불교가 국교로 크게 번성했던 역사 발전 과정에서 생긴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자연환경]
『해동지도』와 『대동여지도』에도 나와 있는 무릉계(武陵溪)는 두타산 북쪽 계곡인데, 이곳에는 삼화사를 비롯한 역사 유물과 무릉반석·관음폭포·쌍폭·용추폭포·병풍바위·장군바위·선녀탕 등의 기암괴석들이 즐비하다. 기암괴석이 많은 이유는 두타산 북쪽 사면이 시대 미상의 삼화화강암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무릉계곡에 있는 기암괴석과 두타산의 북동쪽 지맥인 쉰움산 정상에 수많은 구멍들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석산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지형들인 것이다. 반면에 두타산 정상부를 비롯한 동쪽, 서쪽, 남쪽 사면은 상대적으로 매우 평탄한 지형을 이룬다. 소위 고위평탄면의 모양을 띠고 있다. 두타산은 선캄브리아기의 흑운모 편마암과 편암 등의 변성암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며, 전형적인 토산의 모습을 보인다. 두타산은 강원도 삼척의 삼수령에 해당된다. 하나는 두타산의 북쪽 사면을 따라 흐르는 박달골과 서원터골 계류가 모여 14㎞에 이르는 무릉계곡을 거쳐 전천이 되어 동해로 흘러들고, 남서쪽 사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번천리 평지마을을 거쳐 숙암리에서 골지천과 합류하여 광동댐으로 들어간다. 광동댐은 한강의 지류이다. 두타산 동쪽 사면에서 발원한 여러 계류들은 삼척시의 젖줄인 오십천과 합류하여 동해로 유입된다.
[현황]
많은 자료들이 1353m로 표기하고 있으나 국토지리정보원 발간 1:50,000지형도 삼척 도엽에 표기되어 있는 두타산의 높이는 1357m이다. 예로부터 강원도영동 남부 지역의 영적인 모산(母山)으로 숭상되어 왔다. 두타산은 동해안 지방에서 볼 때 서쪽의 먼 곳에 우뚝 솟아 있기 때문에 정기를 발하는 산으로 여겨져 민중의 삶 속에 근원이 된다고 여겨왔다. 조선선조 때 동인의 중심인물이자 당시 삼척부사로 재직했던 김효원은 『두타산 일기』에서 금강산 다음으로 아름다운 산을 두타산으로 꼽았다. 그래서 두타산은 ‘관동의 금강산’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삼척부 서쪽 45리[약 18㎞]에 있다. 산 중턱에 돌우물이 50개 있으므로 그대로 오십정(五十井)이라 부른다. 그 곁에 신사(神祀)가 있는데 고을 사람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며, 날씨가 가물면 비빌이(祈雨)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 중턱에 돌우물이 50개가 있다는 오십정과 관련된 내용은 두타산의 동쪽 지맥의 봉우리인 쉰움산을 기록한 것이다. 『여지도서』, 『해동지도』, 『1872 지방지도』에도 쉰움산에 대해 표기되어 있다.
현재는 삼화사와 관음암·천은사만이 남아 있지만, 불교가 융성했던 시기에는 중대사·상원사·대승암·성로암·내화암 등 10여 개가 넘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두타산 북서사면에 위치한 천은사는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 창건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천은사의 사찰 이름도 다양하게 변했다가 1899년 이중하(李重夏)에 의해 개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은사는 ‘동안거사(動安居士)’이자 고려 후기의 신진관료로서 개혁적 삶을 살았던 이승휴가 은거하면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승휴가 두타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1252년(고종 39) 문과에 급제한 후 다음 해에 홀어머니를 만나러 삼척으로 왔다가 마침 몽골의 침략으로 길이 막히자 두타산구동(龜洞)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부터였다. 그 후 1280년(충렬왕 6년) 관리들의 감찰을 담당하는 전중시사(殿中侍史)에 임명된 후 국왕의 실정과 국왕 측근들의 전횡을 간언하였다가 파직되자, 삼척두타산천은사에 일종의 별장인 용안당(容安堂)을 짓고 은거했다. 용안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때 저술한 『제왕운기』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칠언시와 오언시를 엮은 서사시로 당대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의 역사 의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천은사 경내에는 ‘삼척두타산이승휴유허지’를 알리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천은사는 2017년에 방영된 ‘왕은 사랑한다’라는 드라마에 이승휴와 관련된 내용을 이곳에서 직접 촬영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천은사 뒷자락에 있는 염불암(念佛岩)은 천은사의 스님이었던 탄숙(坦淑)이 바위 위에서 10년간 목욕 재개하여 수도 염불하였다고 한다.
1662년(현종 3)에 삼척부사 허목이 쓴 『척주지』에 쓴 「두타산기(頭陀山記)」에 의하면 “삼척부 45리[약 18㎞]에 두타산성이 있는데 둘레 8607척[약 2.61㎞]의 석성이다. 1413년(태종 13)에 험준하다고 하여 성을 쌓았는데 후에 왜구가 침입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성안을 도살하였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1414년(태종 14) 삼척부사 김맹손(金孟孫)이 두타산성을 쌓았다는 내용이 있지만 시기가 삼국시대라는 설도 있다. 두타산성은 높이 5척[약 152㎝]의 자연석으로 쌓은 석성으로, 신라와 고구려의 치열한 싸움터였고, 임진왜란 때는 3일 동안 격전을 벌이기도 했던 곳이다. 이때 승승장구 원주 쪽으로 북상하던 왜장 요시나리[吉成]를 맞은 어느 무명 청년장수가 불과 수백 명의 의병으로 3일 동안을 버티다가 계곡 물에서 빨래를 하던 어느 할머니의 비밀통로 제보로 성은 함락되고 의병들은 몰사를 당했다고 한다. 그때의 싸움에서 계곡을 향해 화살을 많이 쐈다고 해서 무릉계곡의 하천 이름이 전천(箭川) 즉, 화살내가 되었다. 화살내 주변에는 혈소(血沼) 또는 적두연(赤豆淵) 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
예전에는 두타산에서 천자의 관을 짜는 데 쓰이는 황장목이 생산되었다. 두타산 능선은 백두대간을 이루어 두타산 남쪽으로 황장산[976m]과 연결된다. 황장산은 황장목 생산과 관련된 지명이다. 두타산과 황장산 사이의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는 안부(鞍部)가 삼척시 미로면 삼거리와 하장면 평지마을을 연결하는 댓재[산신각]이다.
두타산에서 청옥산까지는 약 3.2㎞로 1시간 5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댓재(산신각)에서 통골목이를 거쳐 두타산까지는 약 6.1㎞로 3시간, 번천리에서 통골목이를 거쳐 두타산까지는 약 6㎞로 2시간 30분, 천은사에서 쉰움산을 거쳐 두타산까지는 5.6㎞로 3시간 정도가 각각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