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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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容安堂 |
영어공식명칭 | Yonganda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배재홍 |
[정의]
고려시대 이승휴가 삼척 지역에 건립한 모옥의 당호.
[개설]
이승휴는 1280년에 파직 당하여 삼척두타산 아래로 돌아온 후 구산 골짜기 용계 서쪽에다 모옥을 짓고는 용안당이라 하였다. 여기서 이승휴는 『제왕운기』, 『빈왕록』, 『내전록』 등을 저술하였다.
[이승휴의 생애]
이승휴(李承休)[1224~1300]는 자가 휴휴(休休)이고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로, 경산부(京山府) 가리현(加利縣) 사람이다. 외가는 삼척이다. 이승휴는 1224년(고종 11)에 출생하였다. 당시의 결혼 풍습이 처가살이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외가인 삼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보인다.
이승휴는 29세 때인 1252년(고종 39) 과거에 급제하여 모친을 뵈러 삼척에 내려왔다가 몽고의 제5차 침입으로 길이 막혀 환도하지 못하고 약 11년 동안 삼척에 머물렀다. 그러나 1263년(원종 4) 겨울 관동지방 안집사로 온 병부시랑 이심돈(李深敦)의 권유로 상경하여 비로소 동문원 수제(修製)에 임명되었다. 이후 이승휴는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고 원나라에도 두 차례 갔다 왔다.
그러나 이승휴는 57세 때인 1280년(충렬왕 6)에 전중시사로서 충렬왕의 실정과 부원 세력가들의 횡포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 당하여 다시 삼척두타산 자락 구산 골짜기로 돌아왔다. 이후 잠시 관직에 복귀하기도 하였지만 삼척에 살다가 1300년(충렬왕 26)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승휴의 막내아들 연종(衍宗)은 자기 부친이 두타산 아래에 자리 잡고 살다가 종로(終老)했다고 하였다.
[용안당의 건립과 주변 조경]
이승휴는 1280년 3월에 파직 당하여 삼척두타산 아래로 돌아온 후 구산 골짜기 용계(龍溪) 서쪽에다 모옥(茅屋)을 짓고는 용안당(容安堂)이라는 당호(堂號)를 붙였다. 용안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심용슬지이안(審容膝之易安)’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당호였다. 이 용안당은 말 그대로 조그마한 모옥이었고, 또 화려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용안당은 1280년 3월에서 10월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안당에서 이승휴는 1280년 10월부터 1289년(충렬왕 15)까지 약 10년 동안에 걸쳐 이웃에 있던 삼화사에서 1000상자나 되는 불경을 빌려다가 다 읽었다. 또 이곳 용안당에서 1287년(충렬왕 13)에 대민족서사시인 『제왕운기』를 저술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불교 관계 서적인 『내전록』과 원나라 사행록인 『빈왕록』도 저술하였다.
여기다가 이승휴는 용안당 남쪽 찬물이 솟아나는 샘 위에다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보광정(葆光亭)이라 하고선 소나무, 대나무, 화초 등을 심었다. 보광정은 『장자』의 제물편(齊物篇)에서 따온 명칭이었다. 보광정 안에는 얇은 돌을 깔았고, 그 중앙에는 음식 조리를 위해 작은 우물을 만들어 두었다. 이승휴는 이 우물 이름을 소동파의 「전중시(田中詩)」 시구에서 따와 표음정(瓢飮渟)이라고 하였다. 보광정은 66세 때인 1289년 6월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승휴는 또 보광정 아래쪽에 네모난 못을 파서 지락당(知樂塘)이라 하고선 연(蓮)을 심고 물고기를 길렀다. 지락당은 『장자』의 추수편(秋水篇)에서 따온 명칭이다. 이처럼 이승휴는 용안당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정자 보광정과 연못 지락당을 만들어 놓고선 그 속에서 유유자적하였다. 이승휴는 밝은 달빛이 은은히 비칠 때 지락당 가에서 조용히 쉬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즐거워진다고 하였다.
[용안당의 변천]
이승휴는 나중에 용안당을 한 스님에게 희사하고 암자로 바꾸었다. 편액도 간장암(看藏庵)으로 고쳐 달았다. 이와 함께 간장암 가까이 있는 약간의 토지도 시주하여 스님이 상주하는 밑천으로 삼게 하였다. 이승휴는 또 1294년(충렬왕 20) 봄에 안집사의 허가를 받아 약간의 버려진 공한지(空閑地)를 간장암에 바쳤다. 이때 당시 전후로 이승휴가 간장암에 희사한 토지는 합하여 7~8결(結)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승휴가 용안당에서 간장암으로 개칭한 시기는 1294년 봄 이전인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