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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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承休 |
영어공식명칭 | Lee Seunghyu |
이칭/별칭 | 휴휴,동안거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흥술 |
[정의]
고려 후기에 현재의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활동한 문인이자 학자.
[개설]
이승휴의 자는 휴휴(休休)이고, 자호(自號)는 동안거사(動安居士)이다. 경산부(京山府) 가리현(加利縣) 사람으로, 가리이씨 시조이다. 1287년에 삼척 삼화사 용안당에서 『제왕운기』와 『내전록』을 저술하였다.
[가계]
가리이씨(加利李氏)의 시조이며, 가계는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은 이연종이다.
[활동 사항]
이승휴(李承休)[1224~1300]는 1224년(고종 11)에 태어났으며, 9세에 독서를 시작하여 12세에 원정국사(圓靜國師)의 방장(方丈)[고승의 처소]에 들어가 신서(申諝)에게서 『좌전』과 『주역』 등을 익혔다. 14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외가인 삼척에 주로 거주하였으며, 종조모인 북원군부인 원씨에게서 양육되었다. 몽고군의 침입으로 고려 정부가 천도해 있던 강화도에 들어가 최충(崔冲)[984~1068]의 사학 9재 가운데 하나인 낙성재(樂聖齋) 도회소(都會所)에서 수업하면서 많은 사람과 교유하였다.
1252년(광무 6) 29세의 나이로 최자(崔滋)[1188~1260]가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주관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듬해에 홀어머니를 뵈러 삼척으로 갔다가 몽고의 5차 침입으로 강화도로 돌아가는 길이 막히자 삼척의 요전산성(蓼田山城)에서 몽고군에 맞서 항쟁하였다. 이후 두타산구동(龜洞)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 사이 최씨 무인정권이 무너지고 고려 정부는 몽고와 강화하게 되었다. 이승휴는 41세가 되는 1264년(원종 5)에 이장용(李藏用)[1201~1272]과 유경(柳璥)[1211~1280]의 천거를 받아 경흥부판관겸장서기(慶興府判官兼掌書記)에 보임되었다.
1270년(원종 11) 삼별초가 봉기했을 때는 군수 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횡렴(橫斂)[무법하게 조세를 거둠]과 영선(營繕)[건축물을 새로 짓거나 보수함]으로 백성들이 괴로워한다며 그 폐해를 극론하였다. 1273년(원종 14)에는 식목녹사(式目錄事)로 있으면서 당시 공이 없는 사람들의 관직을 등급을 뛰어넘어서 임용되는 일은 불가하다는 상소문을 초안한 일로 파직되었다가 나중에 누명을 벗었다. 서장관(書狀官)으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 공으로 잡직령겸도병마녹사(雜職令兼都兵馬錄事)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인 1274년(원종 15)에 원종의 부음을 전하기 위하여 다시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당시 원나라에 있던 세자가 호복(胡服)을 입고 장례를 치를까 염려하여 상복을 고려식으로 하도록 권유하였다.
충렬왕 때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우정언(右正言)이 되었다. 이때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15개조로 나누어 간쟁하였다.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충청도안렴사(楊廣忠淸道按廉使)가 되어 뇌물을 받은 관리 7명을 탄핵하고 가산을 적몰했다가 원한을 사서 곧 동주부사(東州副使)로 좌천되었다. 이때부터 스스로를 동안거사라 하였다. 얼마 뒤 전중시사(殿中侍史)에 임명되었지만 1280년(충렬왕 6)에 감찰사 관원들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 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로 간언하다가 파직되었다. 1298년에 충선왕이 즉위해 개혁 정치를 추진할 때 특별히 기용되어 사림시독학사(詞林侍讀學士),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사관수찬관(史館修撰官), 지제고(知制誥)에 임명되었다. 이어 사림시독학사(詞林侍讀學士), 시비서감(試祕書監),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거쳐 동첨자정원사(同簽資政院事), 판비서시사(判祕書寺事), 숭문관학사(崇文館學士)가 되었다. 그러나 70세가 넘어 사직을 요청했고, 밀직부사(密直副使), 감찰대부(監察大夫), 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로 치사(致仕)하였다. 1300년(충렬왕 26)에 7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학문과 저술]
1280년 삼척현의 구동으로 돌아가 용안당(容安堂)을 짓고 은거하며 이곳에서 『제왕운기(帝王韻紀)』와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하였으며, 아들 이연종(李衍宗)이 편집한 『동안거사집(東安居士集)』이 있다. 1287년(충렬왕 13)에 저술한『제왕운기(帝王韻紀)』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7언시와 5언시로 엮은 대서사시로,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동명왕편(東明王篇)』과 쌍벽을 이루는 소중한 작품이다. 이것은 고려 후기 몽고의 침입 등으로 각성된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책은 중국 역사와 우리나라 역사를 상·하권으로 나누어 정리하였으며, 중국과 대등한 시각으로 서술되어 있는 점이 무엇보다 돋보인다.
[상훈과 추모]
『제왕운기』를 저술함으로써 우리 한민족이 단군을 시조로 하는 민족임을 일깨워주는 한편 한민족의 유구한 정통성을 확인시켜 준 이승휴의 자주민족의식을 계승하고 얼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10월 동안이승휴제왕운기문화제가 이승휴사상선양회 주관으로 천은사, 죽서루 등 삼척시 일대에서 개최된다. 제왕운기 탁본체험하기 및 문화제 사진전부터 쉰움산 산행, 동안대제, 옛길 걷기 대회, 이승휴 제왕운기와 관련된 사행시 짓기, 동안이승휴 전국학생백일장 등 행사가 다채롭게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