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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구의 반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339
한자 解丘-叛亂
영어공식명칭 Haegu's Rebell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이현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종결 시기/일시 478년(문주왕 4)연표보기 - 해구의 반란 진압
발단 시기/일시 478년(문주왕 4)연표보기 - 해구의 반란 발발
성격 역사 사건
관련 인물/단체 해구

[정의]

478년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한솔동 지역에 묘역을 조성한 주체로 여겨지는 진씨 세력에 의하여 진압된 반란.

[개설]

478년 백제의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가 은솔(恩率) 연신(燕信)과 함께 대두산성(大豆山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역사적 배경]

해구는 웅진 천도 이후 476년(문주왕 2) 8월 병관좌평에 임명되어 백제의 정권을 주도한 인물이다. 477년 곤지를 제거한 이후 9월 도적을 시켜 문주왕까지 시해하였다. 13세의 어린 삼근왕을 옹립한 해구는 국가 권력을 좌지우지하였다. 웅진천도 직후의 백제 정국은 해구 세력과 연기 지역 진씨를 포함한 반 해구 세력에 의하여 주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과]

해구 세력과 반 해구 세력의 대결에서 밀린 해구는 478년에 은솔 연신과 함께 아산으로 비정되는 대두산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좌평(佐平) 진남(眞男)에게 명하여 군사 2,000명으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다시 덕솔(德率) 진로(眞老)가 거느린 500명의 정예 부대가 공격하여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결과]

백제 왕실과 진씨 세력에 의해 반란이 진압되었다. 진씨는 왕실과 함께 한성에서 이주하여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한솔동 지역의 송원리 고분군 일대에 묘역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이다. 해구는 죽고 반란에 가담한 은솔 연신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은솔 연신의 처자들은 웅진의 시장에서 처형되었다.

[의의와 평가]

해구의 반란은 웅진 천도 직후 백제 지배 세력 내부의 정국이 혼란할 때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해구의 반란이 평정된 후 동성왕의 즉위와 더불어 백제 지배 세력으로 진씨와 웅진 주변의 신진 세력이 등장하였다. 진씨 및 웅진 신진 세력 등장으로 웅진 천도 후의 백제 정국의 혼란이 종식될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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