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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358
한자 壬辰倭亂
영어공식명칭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이칭/별칭 임진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윤윤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선조 25)연표보기 - 임진왜란 발생
종결 시기/일시 1598년(선조 31)연표보기 - 정유재란 종결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조헌|영규|박천붕|김우|고여우|홍신민|변응정|류형|김천일|이순신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현 세종특별자치시를 비롯해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일본과의 전쟁.

[개설]

1592년 4월 일본은 20만 명의 대규모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육군 병력으로는 15만 8700명이나 되는 대군이 동원되었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하자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18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두 달 만에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유린했다.

하지만 전국 팔도 곳곳에서 의병과 승병이 일어나 일본군을 격퇴하기 시작하였다. 충청도에서는 조헌(趙憲)[1544~1592]이 이끄는 의병(義兵)과 승려 영규(靈圭)[?~1592]가 주축이 되어 봉기한 승병(僧兵)이 세종 지역의 연기와 인접한 청주·금산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역사적 배경]

16세기 후반 조선 사회는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 간 정쟁, 사화 세력과 사림 세력 간 당쟁의 영향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국방 체제와 국가 재정도 무너져 외적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하여 설치된 비변사는 당시 제 기능을 하지 못하였고, 위기에 대처할 군사 양성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편 일본은 도요토미 정권이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중국 명나라를 침략하려는 야욕을 드러낸다. 일본은 조선과의 교섭이 계속 결렬되자 결국 원정군을 편성해서 조선을 침공하게 되었다.

[세종 인물의 활약]

충청도 일대에서 최초의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옥천을 중심으로 하여 충청도를 돌면서 7월 공주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을 모았다. 또한 승려 영규는 스스로 승장(僧將)이 되어 승병 수백 명을 규합하였다.

영규가 의병을 일으킨 곳은 세종 지역의 연기로 전하여진다. 영규는 연기 지역의 정만억(鄭萬億) 승려가 의병을 일으키자 자극을 받아 적극적으로 승병을 조직하였다고 한다. 이에 조헌과 영규의 의병진에 연기 지역 의병들이 다수 가담해서 활동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일본군은 몇 달 동안 청주성을 점거해서 충청우도 지방으로 진격하려 하였고, 관군은 청주 지역에서 계속 패하여 연기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공주에서 의병진을 형성한 조헌과 영규는 의병을 이끌고 관군과 함께 8월 1일 청주성의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성 밖으로 나와 조총으로 의병을 공격하였으나 의병은 지형과 산세를 이용하여 일본군을 포위, 치열한 분전 속에서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이 전투에서 연기 북이면[현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출신의 박천붕(朴天鵬)[1545~1592]은 스승 조헌의 종사관으로서 진군하여 순절하였다. 당시 연기현감 임태(任兌)도 일본군을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웠다.

청주성을 수복한 후 조헌과 영규는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진격하였다. 8월 18일 의병은 일본군과 치열한 금산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이튿날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다.

세종 지역 의병으로 활약한 인물로 김우(金瑀)는 금산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하였다. 고여우(高汝雨)는 첨사(僉使)로서 임진왜란 때 적병을 죽이고 생포하는 데 활약하였다. 홍신민(洪信民)[1561~1611]은 조헌의 의병 활동에 가재(家財)를 기울여 지원하였고, 쌀 300석을 풀어 빈민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변응정(邊應井)[1557~1592]은 전라도 해남 현감으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내의 소요를 진정시키고 격문을 돌려 의병을 규합하였다. 조헌과 금산에서 합류해서 공격하기로 약속하였지만 행군에 차질이 생겨 조헌이 전사한 뒤 도착하게 되었다. 이후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으나 일본군의 야습을 받아 웅치(熊峙)에서 전사하였다.

류형(柳珩)[1566~1615]은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강화도로 북상하여 김천일(金千鎰)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막료가 되어 수군 재건에 힘썼으며, 1598년 노량해전에서는 전사한 이순신을 대신해서 군을 지휘하고 승리를 이끌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초기 세종 지역은 조헌과 영규의 영향 하에 있는 양반과 승려 계층이 적극 호응하여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들 의병 활동의 원천은 향촌 공동체를 기반으로 형성된 충성과 의리, 결사항쟁 정신에 있었다.

계속되는 관군의 패배를 대신하여 세종 지역을 포함한 충청도 일대의 의병은 요충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등 백성들이 어려운 국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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