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363 |
---|---|
한자 | 東學農民運動 |
영어공식명칭 | Donghak Peasant Revolution |
이칭/별칭 | 동학운동,동학혁명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한종수 |
[정의]
1894년 세종 지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역사적 배경]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 가자 일본인들은 지배자 행세를 시작하였고, 특히 조선에 이민 온 하층민의 행패가 심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진입을 막기 위하여 잠시 물러난 동학군은 이번에는 일본군과 무능한 조정에 저항하기 위하여 갑오년 9월 일제히 봉기하였다. 전라도의 남접과 충청도의 북접이 힘을 합하였으며, 2대 교주 최시형의 교령을 받아 북접은 손병희, 남접은 전봉준이 각각 이끌고 식량 조달이 용이한 중간 지점인 논산에서 합류하였다.
[경과]
1894년 9월 18일 전의 지역과 천안 목천 일대에서 봉기한 북접 동학농민군 3,000~4,000명은 대접주 김복용(金福用)의 지휘하에 목천(천안) 세성산(細城山)에 집결하였다. 한양에서 내려오는 일본군과 관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동시에 북진하는 전봉준·손병희 연합부대의 진로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세성산은 위치상 충청·전라 동학농민군 진영의 최북단에 있었고, 서울과 근접해 있어 관군과 일본군에는 큰 위협이 되었다. 관군은 충청도의 두 중심지 청주와 공주 방어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가운데 있는 연기 방어에는 거의 힘을 쓰지 못하였다. 동학농민군은 10월 15일 연기관아를 함락하였다.
조정은 이두황의 장위영군을 내려 보냈다. 군대는 9월 20일 한양을 출발해 경기도 죽산(竹山)에 머물면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다가 10월 12일 청주에 도착하였다. 청주에서 합류한 이두황 부대와 성하영의 경리청군은 충청도의 동학 근거지인 보은 장내리를 초토화시켰다. 공주의 충청감영과 청주병영에서는 이두황에게 논산의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진격해 오니 공주로 급히 오라는 급보를 각각 보냈다. 이에 공주로 출발한 이두황은 문의(文義)와 부강(芙江)을 거쳐 18일 금남면 봉암리에 도착하였다.
이두황 부대는 공주 충청감영을 지원하기 위하여 봉암리에 주둔하고 있다가 새벽에 청주병영으로부터 ‘청주병영군이 세성산의 동학농민군을 치기 위하여 21일 출병해서 목천 북면의 양지리(陽地里)에 주둔할 것이니 속히 합세하라’라는 내용을 전달받았다. 이두황은 충청감사의 지원 요청을 무시하고 이 제안을 받아들여 10월 20일 아침 세성산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이두황이 충청감영의 허락도 받지 않고 청주병영의 지시에 따라 목천(천안) 세성산으로 군대를 이동시킨 이유는 세성산이 서울로 가는 길목일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군이 공주와 청주 사이로 진출한다 해도 관군에 큰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두황의 장위영군은 연기 지역을 통과하여 20일 저녁 현 천안시 병천면의 송정리를 거쳐 이튿날 아침 7시경 현재의 천안시 수신면 장명동으로 이동하였다. 이어 동학농민군의 동태와 세성산의 지형을 정탐하고 오전 9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오후 5시를 넘기자 대항하던 동학농민군은 성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후퇴하였다. 동남쪽으로 올라간 이두황 부대는 성을 차지하였고, 동학농민군의 요충지 세성산성은 관군에 무너졌다.
이두황의 전투보고서에는 세성산에서 조총 140정과 화살촉 2,000개 등 많은 무기와 백미 266섬 등 군량을 획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상당한 양이 연기 지역에서 조달한 것이겠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동학농민군이 이처럼 많은 무기와 식량을 세성산에 쌓은 것으로 미루어 그만큼 농민군에게 세성산이 중요하였으며, 사수하겠다는 결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세성산 전투의 패배는 동학농민군 전체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결과]
세성산 전투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은 많게는 전사 370명, 중상자 770명, 포로 17명에 이르렀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동학농민군의 시신은 세성산에 버려졌고, 북쪽 절벽으로 떨어져 죽은 동학농민군 또한 적지 않았다. 접주들의 집은 모두 불태워졌다. 세성산 전투는 천안 땅에서 벌어졌지만 같은 해 12월 관군이 동학농민군에 참여한 지도자급 25명을 전의에서 체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의 출신의 참여가 많았음이 확실하다.
세성산 전투 승리로 일본군과 관군의 남진은 용이하여졌고, 10월 27일과 10월 28일 일본 중로군은 연기 지역을 통과하여 공주로 진입하였다.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은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부터 11월 23일[음력 10월 26일]까지 공주 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농민군은 대패하여 후퇴하였다. 청주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지만 역시 농민군이 패하였다. 농민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였고, 12월 5일[음력 11월 9일] 남접과 북접 연합군 1만여 명이 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은 수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동학혁명은 사실상 실패로 끝나게 된다. 세성산 전투는 우금치 전투의 서막이자 전초전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세종특별자치시 일대는 우금치 전투가 일어난 공주와 동학군의 주요 목표이던 청주, 세성산 전투가 일어난 목천 가운데 있어서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모두 통로로 활용한 요충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