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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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錦壁亭- |
영어공식명칭 | Site of Geumbyeokj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정자말길 39-2[금암리 32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수연 |
건립 시기/일시 | 17세기 - 금벽정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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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982년 - 금벽정 철거 |
훼철|철거 시기/일시 | 2001년 - 금벽정 철거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92년 - 금벽정 복원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7년 06월 05일 - 금벽정 충청남도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2호 지정 |
문화재 해지 일시 | 2000년 10월 19일 - 금벽정 충청남도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2호 지정 해지 |
현 소재지 | 금벽정 터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정자말길 39-2[금암리 321] |
원소재지 | 금벽정 터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정자말길 39-2[금암리 321] |
성격 | 터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금암리에 있던 정자의 터.
[개설]
금벽정(錦壁亭)은 조석명(趙錫命)[1674~1753]이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자로, 탁금정(濯錦亭)과 같은 장소에 있었다.
[연혁]
금벽정은 10여 년 앞서 탁금정이라 불려지기도 한 곳으로, 1658년 윤선거(尹宣擧)[1610~1669]와 1661년 윤순거(尹舜擧)[1596~1668] 및 1년 뒤 윤선거의 아들 명재 윤증(尹拯)[1629~1714]이 지은 탁금정 시가 전해진다.
한편 금벽정은 『송자대전(宋子大全)』을 통해 정자 명칭이 처음 확인된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1669년 금벽정에서 충청도관찰사 이숙(李䎘)[1626~1688]과 만나 시를 짓고, 그후 의정부 사인을 지낸 조대수가 창벽에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지은 시에도 금벽정이 묘사되어 있다.
조대수가 금벽정에 대한 기록을 남긴 지 30여 년 후 이중환(李重煥)[1690~1756]은 1751년에 엮은 『택리지(擇里志)』 「팔도총론(八道總論)」에서 금강 가의 정자들을 소개하며 ‘금벽정은 조상서의 정자(錦碧爲趙尙書庄)’라 소개하고 있다. ‘조상서(趙尙書)’는 조대수의 아들 조석명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석명의 부인 남원윤씨의 묘소가 금벽정 후록(後麓)[뒤편 기슭]에 위치하고 조대수가 낙향 이후 풍양조씨가 이 지역에 정착한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조대수는 노년에 서울을 떠나 공주 금강 변의 경관이 수려한 창벽에 호해루(湖海樓)라는 누각을 짓고, 이곳에서 노년을 보냈던 것이다. 금벽정은 1871년 간행된 『호서읍지(湖西邑誌)』에는 철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치]
금벽정(錦壁亭) 터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금암리에 위치해 있다. 맞은편에 기암절벽인 창벽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아래로 금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어 절경을 이룬다.
[변천]
금벽정 위치는 처음에 ‘탁금정’이라 불리는 곳에 있었다가 현재 금암리 마을회관 근처인 풍양조씨 종가 옆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풍양조씨 후손들이 대부분 마을을 떠나고 건물이 낡아 관리하기 어렵게 되자 1982년에 철거되었으며, 기와와 목재는 마곡사 보수에 사용되었다.
1992년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김진갑의 땅을 희사 받아 창벽 건너편에 금벽정을 복원하였으나 도로 확장 및 포장 공사로 다시 헐렸다. 이곳이 본래 금벽정이 있었던 곳이라고 전한다.
[의의와 평가]
금벽정은 경관이 뛰어난 곳에 있었다. 금벽정 맞은편의 창벽은 기암절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하듯 우뚝 솟아 있고, 절벽 아래로 금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어 금강의 절경 중 가히 백미(白眉)라 할 수 있었다.
금벽정 터는 조선의 관리와 선비들이 아름다운 자연을 조망하면서 자신의 학문과 사상, 정치적 소신 등을 기탄없이 피력한 문화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