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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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陽洪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선빈 |
입향 시기/일시 | 15세기 중엽 - 홍순손이 외가인 연기현으로 입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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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 시기/일시 | 1636년경 - 홍익청이 처향인 전의현으로 입향 |
입향 시기/일시 | 450여 년 전 - 홍인성이 금남면 성덕리으로 입향 |
입향지 | 남양홍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서정리 |
묘소|세장지 | 연서 효교비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기룡리 713-55 |
묘소|세장지 | 홍일섭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신대리 |
묘소|세장지 | 충신 홍직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서정리 내성마을 |
성씨 시조 | 홍은열 |
입향 시조 | 홍순손|홍익청|홍인성 |
[정의]
홍은열을 시조로 하고 홍순손, 홍익청, 홍인성 등을 각각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에 남양홍씨는 남양군파와 문정공파가 거주하고 있다. 15세기 중엽 남양군파의 홍순손이 어린 나이에 홀어머니와 함께 외가인 연기현으로 입향하였고, 병자호란 때 홍익청이 처향인 전의현[전의면 서정리]으로 입향하였으며, 금남면 성덕리의 남양홍씨 문정공파는 홍인성이 450여 년 전에 입향하였다. 조선 후기 남양홍씨는 연기현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여 오늘날에도 후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연서면에는 관련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연원]
남양홍씨의 선 시조 홍천하(洪天河)는 고구려 영류왕[재위 618~642] 때 중국 당나라에서 팔학사의 일원으로 건너와 유학을 가르치는 등 문화 활동을 펴다가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서 신라로 피신하였다. 선덕여왕 재위 시 유학 발전에 공을 세워 당성백(唐城伯)[당성은 남양의 옛 이름]에 봉해졌고, 신무왕 때는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추대되었다. 이후 당성이 남양으로 개칭되면서 후손들이 남양을 본관으로 삼고, 홍은열(洪殷悅)을 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를 이어오고 있다.
[입향 경위]
홍은열을 시조로 하는 남양홍씨는 ‘당홍(唐洪)’과 ‘토홍(土洪)’ 두 계열로 나뉜다. 남양홍씨 당홍의 세계는 시조의 12세손에서 갈라진 13파 등 15개 파로 대별된다. 세종특별자치시 입향은 남양군파와 문정공파이다.
홍주(洪澍)를 파조로 하는 남양군파(南陽君派)의 세종특별자치시 입향조는 홍순손(洪順孫)이다. 홍순손의 아버지는 감찰(監察)을 지낸 홍중복(洪仲復)이고, 어머니는 자헌대부 호조판서(資憲大夫戶曹判書)를 지낸 유선(兪善)[기계유씨의 연기 입향조, 홍씨 집안의 족보에는 유선을 강진유씨라고 기록하고 있다]의 딸 기계유씨(杞溪兪氏)[1423~1501]이다. 남양군 홍주(洪澍)의 넷째 아들 판사(判事) 홍빈(洪斌)은 조선 개국과 함께 장령을 제수(除授) 받았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不仕] 예산에 은거(隱居)[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삶]하였다. 그 후 손자인 홍중복(洪仲復)이 무과를 거쳐 감찰이 되었을 때 업무상 강진(康津)에 유배된 기계유씨 유선과 연결되어 유선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런 연유로 그 후 홍중복이 일찍 죽자 기계유씨는 유복자인 홍순손을 낳고 3년상을 치른 뒤 친정인 연기 지역으로 이거(移居)하게 된다.
전의면 서정리 남양홍씨 입향조는 홍익청(洪翼淸)으로 병자호란(1636년) 때 전의에 낙향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홍익청은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이조판서를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 받은 홍사부(洪士俯)의 손자이며, 음직으로 군수를 지낸 홍이정의 아들이다. 홍익청은 진사로서 호조참의를 증직 받았으며, 전의 지역에 세거하고 있던 거창신씨 신몽상(愼夢祥)의 딸과 혼인한 후 남양에서 전의로 옮겨 오게 되었다고 한다. 홍익청의 아들 홍직(洪稙)[1571~1637]은 1602년(선조 35)에 32세의 나이로 별시무과에서 장원급제하였으며, 방목(榜目)에 홍직의 거주지가 전의(全義)로 기록되어 있다. 홍직은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일등공신에 책록되었고, 정묘호란 때 공을 세워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후 병자호란 때 문의현령으로서 정방산성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하였다. 전의면 서정리에 충신 홍직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가 있다.
금남면 성덕2리에 거주하는 남양홍씨는 문정공파(文正公派)이다. 입향조는 홍인성(洪仁成)으로 450여 년 전에 남양으로부터 이주하여 입향하였다고 하지만 자세한 입향 유래는 알 수 없다.
[현황]
홍순손의 입향 이후 남양홍씨 집안은 매우 빠른 속도로 향촌 사회 내에서 지위를 확보하여 갔다. 창녕성씨·강릉김씨·강화최씨 등 연기 지역 유력 성씨들과 혼인 관계를 맺는 한편 중봉 조헌, 석호 윤문거, 소재 이이명 등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적 관계를 견고하게 구축해 갔다. 중앙 정계와의 연계도 계속해서 시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홍신민이 가재를 기울여 조헌의 의병활동을 지원하였는가 하면 홍상경은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란할 당시 공(功)을 세웠다. 또한 홍득일은 김일경의 역모 사건에 소두로 앞장서는 등 중앙 정치 변화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하게 움직였다.
연기 지역에서 남양홍씨는 ‘천홍만림(千洪萬林)’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확고부동한 지위를 확보해 나갔다. 이는 1645년에 작성된 연기 향안 좌목에 홍연경[1579~1647]을 비롯한 입향조 홍순손의 현손들과 홍연경의 아들 홍정설을 위시한 5대손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으며, 또한 시대가 내려오면서 향안(鄕案)[향족 명부]에 등재된 남양홍씨 수가 상당히 증가한 점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오늘날 남양홍씨는 연서면 쌍전리·성제리·월하리에 고른 분포를 보이며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홍연경과 아들 홍정설, 손자 홍우적·홍우평·홍우구, 증손 홍만, 현손 홍득일 등 5대에 걸친 7명의 효행으로 1772년(영조 48) ‘효교동(孝橋洞)’이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 받았다. 연서면 신대리와 기룡리의 중간 지점쯤에 해당하는 마을 새터말의 입구 도로변에 이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건립한 남양홍씨 집안의 연서 효교비(燕西孝橋碑)가 있으며, 연서 효교비는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서면 신대리에 홍일섭(洪日燮)[1878~1935]의 묘소와 비석, 그리고 기적비가 있다.
전의면 동교리에 판서 홍억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고, 서정리에 충신 홍직 정려(旌閭)가 있다. 충신 홍직 정려는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