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29 |
---|---|
한자 | 扶安林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윤윤희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342년(충혜왕 복위 3) - 임난수 출생 |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407년(태종 7) - 임난수 사망 |
입향 시기/일시 | 여말선초 - 임난수 입향 |
분관|분종 시기/일시 | 1400년대 초중반 - 임난수 전서공파 |
분관|분종 시기/일시 | 1400년대 초중반 - 임목 양양부사공파 |
분관|분종 시기/일시 | 1400년대 초중반 - 임서 사직공파 |
분관|분종 시기/일시 | 1400년대 초중반 - 임흥 위의공파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8년 - 독락문화제 |
본관 | 부안임씨 본관 - 전라북도 부안군 |
입향지 | 부안임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
세거|집성지 | 부안임씨 세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남곡리 |도담동 도램마을|조치원읍 일원 |
묘소|세장지 | 임난수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용호리 |
묘소|세장지 | 숭모각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88-4 |
묘소|세장지 | 임씨 가묘 - 세종특별자치시 나성길 10-48[나성동 101] |
묘소|세장지 | 연기 세종리 은행나무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88-5 |
묘소|세장지 | 나성 독락정 -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101 |
성씨 시조 | 임계미 |
입향 시조 | 임난수 |
[정의]
임계미를 시조로 하고 임난수를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임계미(林季美)를 시조로 하고 임난수(林蘭秀)[1342~1407]를 입향조로 하는 부안임씨는 1300년대 후반 600여 년 세거지인 연기군 남면 양화리[현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에 정착한 이래 전서공파(典書公派)를 형성하여 지금까지 명실공히 세종 지역을 대표하는 성씨이자 유력한 성씨로 살아오고 있다.
[연원]
부안임씨 도시조(都始祖) 임팔급(林八及)은 중국 당나라 때 한림학사·병부상서를 지냈다. 어지러운 정세 속에 참소를 당하자 신라에 망명해서 팽성 용주방[현 평택시 팽성읍]에 세거하였고, 적병을 토벌한 공(功)으로 충절이라는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받았다. 시조 임계미는 고려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평장사를 지내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보안현[현 전라북도 부안군]에 정착하여 후손들이 부안을 본관(本貫)으로 삼았다.
부안임씨는 고려 후기에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명문거족으로 성장하였다. 뛰어난 인물 중 임춘(林椿)은 『국순전』, 『공방전』, 『서하선생집』 등을 저술한 문인으로 유명하다. 이후 부안임씨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는 임춘의 둘째 아들 임경세(林敬世)와 손자 임숙(林淑)으로 이어지고, 임숙의 넷째 아들 임난수에 이르러 공주와 연기 일대를 중심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입향 경위]
입향조 임난수는 고려 후기 무신으로, 1374년(공민왕 23) 최영(崔瑩) 장군과 함께 탐라를 정벌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적에게 오른팔이 잘리자 잘린 팔을 화살통에 꽂고 싸워 전승으로 이끌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관직은 흥복도감 녹사에 임명되어 낭장·호군·우윤 등을 거쳐 공조전서에 이르렀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전라도 부안으로 낙향하던 중 충청도 공주목 삼기촌[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에 정착해서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다. 이후 전서공파는 임난수의 아들 임목(林穆)의 양양부사공파, 임서(林敍)의 사직공파, 임흥(林興)의 위의공파로 분파되었다. 후손들은 옛 연기 지역인 남면 양화리·고정리·월산리·송담리·진의리·방축리를 비롯하여 연동면 명학리·용호리와 금남면 남곡리·용포리 등지에 흩어져 살며 부안임씨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현황]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의 성』 에는 부안임씨가 남면 양화리에 176가구, 금남면 남곡리에 43가구가 거주하는 동족마을로 기록하고 있다.
1935년 『조선의 취락』에는 충청남도의 특색 있는 동족부락으로 세거리(世居里)가 소개되어 있다.
1988년 연기군의 부안임씨는 세거지인 양화리에 228가구, 진의리 101가구, 송담리 92가구, 용호리 52가구, 명학리 57가구, 남곡리 38가구가 거주한 것으로 확인된다.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으로 옛 연기군 남면·금남면·동면 일대의 편입지에 살던 부안임씨는 대대로 일구어 온 고향을 떠나 인근 지역에 살고 있다.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연기군의 부안임씨는 1985년에는 1,285가구에 4,951명이 거주하였으며, 2000년에는 1,221가구에 3,593명이 거주하였다.
2015년 세종특별자치시의 부안임씨는 3,724명이다.
[관련 유적]
매년 음력 10월 3일 전국의 부안임씨들이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5호인 숭모각(崇慕閣)에 모여 현재 부안임씨 시조를 포함한 11현의 위패에 향사(享祀)[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나타냄]하고 있다.
또한 임난수의 절의를 기려 세종이 내린 부조묘인 임씨 가묘(林氏家廟)에서 매년 음력 6월 21일 불천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임씨 가묘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난수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가 연기 세종리 은행나무라는 이름으로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목이 낙향해서 지은 독락정(獨樂亭)은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외에도 임난수 입향 설화와 관련된 유적 및 부안임씨 충·효·열을 기리는 문화유산 등이 세종 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다.
임난수의 출생과 충절을 기리는 독락문화제가 2008년 시작되어 매년 개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