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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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蘭秀 |
영어공식명칭 | Im Nansu |
이칭/별칭 | 전서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342년(충혜왕 복위 3) - 임난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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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374년(공민왕 23) - 최영 장군의 탐라 정벌에 참전하여 큰 공 세움 |
몰년 시기/일시 | 1407년(태종 7) - 임난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419년(세종 1) - 임난수 사당 불천지위 허락 |
추모 시기/일시 | 1710년(숙종 36) - 임난수 사후 기호서사 창건 |
출생지 | 임난수 출생지 - 전라북도 부안 |
거주|이주지 | 임난수 은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
묘소|단소 | 임난수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합강리 |
사당|배향지 | 기호서사 -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부안 |
대표 관직 | 공조전서 |
[정의]
고려 후기 세종 지역에 정착한 문신.
[개설]
임난수(林蘭秀)[1342~1407]는 세종 지역 세거 성씨인 부안임씨 입향조이다.
고려 후기 벼슬이 공조전서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삼기촌[현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으로 들어와 평생 은거(隱居)[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삶]하며 살았다.
후손들이 연기현 일대에 대대로 거주하며 세종 지역에서 가장 큰 집성촌을 이루었다.
[가계]
임난수의 본관(本貫)은 부안(扶安)으로, 1342년(충혜왕 복위3) 전라도 보안현[현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아버지 임숙(林淑), 어머니 유씨(劉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최유(崔濡)의 딸과 혼인하여 네 아들을 두었다.
맏아들 임모(林摹)는 수사(水使), 둘째 아들 임목(林穆)은 양양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 셋째 아들 임서(林叙)는 충의교위좌군사직(忠毅校尉左軍司直), 막내 아들 임흥(林興)은 위의장군(威毅將軍)을 지냈다.
[활동 사항]
임난수는 1374년(공민왕 23) 32세에 최영 장군의 탐라 정벌에 참전하여 큰 공(功)을 세웠다. 당시 적에 맞서 싸우다 오른쪽 팔이 잘렸지만 잘린 팔을 화살통에 꽂고 계속해서 싸워 승리하였다는 일화가 전하여진다.
흥복도감(興福都監) 녹사(錄事), 낭장(郎將), 호군(護軍)등 11관(官)을 거치고 마지막으로 공조전서에 올랐으나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한 하늘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관직을 버리고 충청도 공주목의 삼기촌에 낙향하여 생활하다가 1407년(태종 7)에 생을 마감하였다.
[묘소]
임난수의 묘역은 실전(失傳)[고적 따위에 관련되어 전하여 오던 사실을 알 수 없게 됨]되었다가 8세손 임찬현이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합강리 묘역 주변을 보수하다가 매장지(埋葬地)[시체나 유골 등을 묻는 땅]를 발견하고 1682년에 비석을 세웠다.
비명(碑銘)은 송시열이 찬(撰)하고 박태유가 서(書)하였으며, 민유중이 전서(篆書)[한자 서체의 하나인 전자체로 쓴 글씨]를 썼다.
[상훈과 추모]
1418년에 길재·정몽주·임난수 등 18인을 제사 지내다가 1419년(세종 원년) 고려 유신(遺臣)[왕조가 망한 뒤에 남아 있는 신하]으로서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은 임난수의 사당에 ‘임씨 가묘(林氏家廟)’라 선액(宣額)[임금이 사우나 서원 따위에 이름을 지어 줌]하고 불천지위(不遷之位)[예전에 큰 공훈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神位)]로 모시도록 명하였다. 이와 함께 사패지(賜牌地)[고려·조선시대에 임금이 내려준 논밭]로 ‘나성일구강산(羅星一丘江山)’을 하사하였다. 사패지는 옛 나성리 일대와 양화리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710년에는 임난수를 제향(祭享)하는 기호서사를 창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