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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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穎陽千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선빈 |
입향 시기/일시 | 1900년경 - 영양천씨 입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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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영양천씨 본관 - 중국 하남성 등봉현 영양진 |
입향지 | 영양천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연기리 |
성씨 시조 | 천암 |
[정의]
천암을 시조로 하고 천만리를 중시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입향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영양천씨(潁陽千氏)는 좌윤공파의 통덕랑공파가 부여 은산에서 살다가 금강 수운을 이용한 상업 활동과 파평윤씨와의 혼인을 인연으로 1900년경 남면 연기리로 입향하였다.
[연원]
영양천씨는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이다. 시조 천암(千巖)은 명나라 때 도총장(都總將)과 판도승상(版圖丞相) 등을 역임하였고, 후손이 영양(穎陽)에서 살았다. 영양은 중국 노(魯)나라 지명으로, 지금의 하남성 등봉현 영양진이다.
중시조 천만리(千萬里)는 명 후기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병영양사(調兵領糧使) 겸 총독장(總督將)으로 두 아들 천상(千祥)과 천희(千禧)를 데리고 조선에 파병되어 군량 수송을 담당하였고, 평양·곽산·동래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도 직산, 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귀화한 천만리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 봉조하(奉朝賀)의 벼슬을 내리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하였으며, 전(田) 30결(結)을 급복(給復)[조선시대에 충신, 효자, 절녀 등에게 요역과 전세 이외의 잡부금을 면제하여 주는 것]하였다. 또한 장남 천상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차남 천희는 평구도찰방(平邱道察訪)으로 승진시켜 자손에게 세록(世祿)[대대로 받는 녹봉]을 전수받게 하였다.
[입향 경위]
연기면 연기리의 영양천씨는 좌윤공파 천상의 후손으로,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에 속한다. 부여 은산에서 살다가 1900년을 전후하여 남면 연기리[현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연기리]로 입향하였다. 보통리에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금강에서 소금 뱃일을 하면서 연기면 봉기리에 살던 파평윤씨 가문과 혼사가 이루어지면서 가까운 연기리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해에서 소금배가 금강을 따라 부강까지 올라가던 시기가 1920년경까지였고 당시 강의 물길은 봉기리 마을 앞을 흐르고 있었다.
[현황]
금강에서 뱃일을 하던 후손들은 도로 발달로 인하여 수로 이용이 쇠퇴하는 1920년 이후에는 직업을 바꾸어 연자 방앗간을 운영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