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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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錦南面達田里昌寧成氏檜谷公派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있는 창녕 성씨 화곡공파 집성촌.
[개설]
금남면 달전리에 세거하는 창녕성씨 회곡공파는 회곡공 성석용(成石瑢)[?~1403]을 파조로 하며, 성석용의 손자 성희(成熺)[?~1464]가 입향조이다.
[현황]
금남면 달전리 전체 100가구 중 50가구가 창녕성씨이다.
[입향 경위]
금남면 달전리의 창녕성씨는 성석용을 파조로 하는 회곡공파(檜谷公派)로, 입향조는 성석용의 손자인 인재(仁齋) 성희이다. 성희는 성삼문의 당숙(堂叔)[아버지의 사촌 형제]이다.
1456년(세조 2) 성희는 성삼문을 도와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중 거사가 발각되어 10여 차례나 극심한 고문을 받고 김해로 유배되었다가 서울에서 300리[약 120㎞] 바깥에 나가 살라는 세조의 명으로 상경을 포기하였다. 처음에는 연기군 남면 양화[현 세종특별자치시 어진동]로 갔으나 다른 성씨가 이미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기 때문에 금남면 반곡리를 거쳐 달전리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배출 인물]
창녕성씨 대표 인물로는 입향조인 성희와 성희의 아들 성담년, 조선 전기 학자이자 문신인 성제원, 항일 의사 성기운 등이 있다.
성희는 성삼문의 당숙이다. 자는 용회(用晦), 호는 인재(仁齋)이다. 비서원교리(秘書院校理) 겸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지냈다. 기사관(記事官)으로서 『세종실록』, 『문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성희는 1456년(세조 2) 조카 성삼문을 도와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거사가 발각되어 극심한 고문을 받고 김해로 유배되어 2년 뒤에 부강에 이르렀으나 서울에서 300리 바깥에 나가 살라는 세조의 명에 따라 상경을 포기하고 달전리에 정착하였다. 성희의 두 아들 중 생육신 성담수(成聃壽)[?~1456]는 파주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며, 달전리에는 성담년의 자손들이 동족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성담년(成聃年)[1441~1483]의 자는 인수(仁叟), 호는 정재(靜齋)이다. 1470년(성종 1)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477년에는 경연 검토관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예문관 수찬·사간원 정언을 역임하고, 1479년에 공조정랑과 이조정랑이 되었다. 1483년(성종 14) 죽은 후 사헌부대사헌창녕군(司憲府大司憲昌寧君)에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되었다.
성제원(成悌元)[1506~1559]은 성담년의 손자이다. 자는 자경(子敬), 호는 동주(東洲) 또는 소선(笑仙),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는 청헌(淸憲)이다. 금남면 달전리에서 출생하였고, 송귀수(宋龜壽)·송인수(宋麟壽)와 더불어 삼현(三賢)으로 칭하여졌다. 잦은 사화를 보면서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성운(成運)·조식(曺植)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쌓고 후학을 가르쳤다. 성제원은 성리학과 지리·의학·복술 등에 두루 능하였으며, 1553년(명종 8) 유일(遺逸)로 천거(薦擧)[어떤 일을 맡아 할 수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쓰도록 소개하거나 추천함]되어 주부를 거쳐 보은현감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어서 칭송을 들었다고 한다. 사후 규장각 제학에 추증(追贈)되었고, 묘소는 달전리 망동에 있다. 공주의 충현서원, 창녕의 물계서원 등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으로 『동주유고』가 있다. 문집 목판이 현재 연기향토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달전리 뒷산에는 동주선생 망묘대(東洲先生望墓臺)가 있다. 동주선생 망묘대에는 성제원이 아침저녁으로 올라 부모의 묘소를 바라보며 그리워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성기운(成璣運)[1877~1956]은 일제강점기의 항일 의사이다. 자는 순재(舜在), 호는 덕천(德泉)이다. 성제원의 후손으로, 말년에 달전리에 거주하며 충청도의 유명한 학자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공부하였다 한다. 성기운은 일제 침략의 위기적 상황을 맞아 강상의리(綱常義理)를 세우고 존양대의(尊攘大義)를 주장함으로써 선비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특히 스승 간재와 달리 의리 실천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일제의 호적령과 조세, 부역 등 각종 정책에 반대하다가 1917년 5월부터 8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구속되기도 하였다. 1928년에 달전리에 정착한 뒤에는 독서와 저술에 전념하였으며, 1953년에는 충현서원(忠賢書院) 원장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덕천선생문집』, 『덕천집습유』가 전해진다. 달전리에는 성기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2년 건립한 병산사가 있다.
[관련 유적]
성삼문의 충신 정려가 금남면 달전리에 세워진 것은 1904년이다. 달전리에 대대로 거주하던 창녕성씨들은 지역 사족들과 함께 1787년(정조 11)에 성희를 공주 충현서원에 추배하도록 상언(上言)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고, 고종 대인 1901년(광무 5)에 성기운이 명정(銘旌)[충·효·열을 행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주는 최고의 포상] 상소(上疏)[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를 올려 성삼문의 충신 명정을 받게 되었다.
충신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를 받은 뒤 1903년(광무 7)에는 성주영(成周英)이 봉사손(奉祀孫)[조상의 제사를 맡아 받드는 자손]으로 결정되면서 달전리의 달재 아래에 사우(祠宇)[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집]를 세워 향사(享祀)[제사를 지냄]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67년 사우(祀宇)를 개축하여 영정을 봉안(奉安)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쓴 문절사(文節祠)라는 현판을 걸게 되었다.
문절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전퇴 1칸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매죽헌사우(梅竹軒祠宇)’라고도 불린다. 문절사 내부에는 1903년 고종의 어명으로 내려진 영정을 중앙에 모시고 영정 오른쪽에 충의(忠義), 왼쪽에 정심(正心)이라 쓰인 족자를 걸었다.
병산사(屛山祠)는 달전리 남쪽 비탈진 곳의 낮은 구릉(丘陵)[언덕] 중단부에 동남향으로 위치한다. 항일 의사 성기운을 제향(祭享)하기 위하여 1972년 문인 성구용과 고을 유림들이 건립하였다. 사당 병산사와 외삼문인 숭의문이 있다. 사우(祀宇) 동편에는 병산사묘정비(屛山祠廟廷碑)가 있다. 성기운의 문집과 목판 250점이 보관되어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 7일에 성기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낸다.
이 외에도 달전리에는 1938년에 건립된 성담년 묘비와 1944년에 건립된 성몽선(成夢宣) 묘표[표석], 입향조 성희를 기리기 위하여 1975년에 세운 인재공 유적비가 있다.
[의의와 평가]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는 창녕성씨 회곡공파 집성촌이며, 입향조는 성희이다. 현재 세거하는 창녕성씨는 성희의 아들 성담년의 후손들이다.
창녕성씨 회곡공파 대표 인물로는 입향조인 성희와 성희의 아들 성담년, 조선시대 학자이자 문인인 성제원, 항일 의사 성기운 등이 있다.
유적으로는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된 금남 문절사와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6호로 지정된 병산사가 있다. 그리고 충신 성삼문의 정려가 있다.
세종 지역의 대표적인 동족 마을인 달전리는 창녕성씨의 집성촌으로, 동족의 시제와 함께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운영하는 애향계와 상여계인 연반계가 유지되고 있다. 세종 지역 마을의 생활 공동체 조직을 엿보게 하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