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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615
한자 金承珪
영어공식명칭 Gim Seonggyu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강경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452년(문종 2) - 김승규 사복시 소윤에 임용됨
활동 시기/일시 1453년(단종 1) - 김승규 중훈대부 전농윤에 임명됨
몰년 시기/일시 1453년(단종 1)연표보기 - 김승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47년(영조 23) - 김승규 명정을 받음
추모 시기/일시 1791년(정조 15)연표보기 - 김승규 장릉배식단에 배향됨
사당|배향지 장릉배식단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33-1
성격 문신|효자
성별
본관 순천
대표 관직 병조참의

[정의]

조선 전기 세종 지역 출신의 효자이자 문신.

[개설]

김승규(金承珪)[?~1453]는 김종서(金宗瑞)의 첫째 아들로 지평·형조정랑 등을 거쳐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1453년 계유정난 때 아버지 김종서가 철퇴에 맞으려 하자 자신의 몸으로 가로막다가 죽었다. 1791년(정조 15) 김종서와 함께 장릉(莊陵) 배식단에 배향(配享)되었고 1747년(영조 23)에 명정(銘旌)[충·효·열을 행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주는 최고의 포상]을 받아 정려(旌閭)[충신·효자·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가 건립되었다.

[가계]

김승규의 본관(本貫)은 순천(順天)이다. 아버지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명장인 절재(節齋) 김종서이다. 김승규의 부인은 서산 지역의 유력 성씨인 서산류씨 류쟁(柳諍)의 딸이다. 김종서의 가족들에 대한 처벌은 『대명률』의 ‘모반대역조(謀反大逆條)’가 준거가 되었다. 1453년 계유정난이 발발한 지 이틀이 지나 수양대군은 김종서·김승규와 같이 주형(誅刑)을 받은 사람들의 아비와 자식으로 나이 16세 이상인 자는 영원히 변군 관노(官奴)에 붙이고, 나이 15세 이하인 자 및 모녀·처첩·조손·형제·자매 또는 자식의 처첩은 영구히 외방 관노(官奴)에 붙이며, 백숙부와 형제의 아들은 외방에 안치(安置)[조선시대에 먼 곳에 보내어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게 주거를 제한하던 일 또는 그런 형벌]토록 하고, 김종서와 김승규의 재산은 모두 적몰(籍沒)[중죄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까지 처벌하던 일]하였다. 1454년(단종 2) 8월에는 김종서의 아들 김목대, 김승규의 아들 김조동·김수동 등도 법에 의한 처치를 지시하여 모두 사형 당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 세종 지역의 유력한 가문이었을 김종서 가문은 계유정난 이후 파괴되었다. 사림이 정계에 본격 진출하는 숙종 대에 김종서 가문에 대한 신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숙종 말에 김종서 후손에 대한 서용(敍用)[죄를 지어 면관되었던 사람을 다시 벼슬자리에 등용함]이 이루어졌다. 서용된 후손은 김종서의 10세손인 김익량이었다. 김종서의 질녀서였던 송시열의 5대 조부가 당시 3세의 아이를 숨겨 주어 김종서의 혈통이 보존되게 하였으며, 김익량의 서용 이후 순천김씨 가문의 신원 회복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활동 사항]

김승규는 1452년(문종 2) 사복시 소윤에 임용되었다. 다음 해인 1453년(단종 원년)에는 중훈대부전농윤에 임명되었으며 형조정랑 등을 거쳐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같은 해 계유정난 때 아버지 김종서가 수양대군과 하수인의 철퇴를 맞고 실신하였으나 아들 김승규가 몸으로 막아 대신 숨졌다.

[상훈과 추모]

조선 후기에 김승규를 비롯한 김종서 등의 충절이 국가로부터 공인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아버지 김종서에 대한 복권(復勸)이 시작되었으며 김종서에 대한 본격적인 신원 작업은 김종서가 죽음을 당한 지 227년 만인 1680년(숙종 6)에 시도되었다. 숙종조에 김종서의 신원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숙종 말에 후손에 대한 서용(敍用)이 이루어졌다. 김승규는 1791년(정조 15) 아버지 김종서와 함께 장릉 배식단에 배향되었다. 김승규의 명정 현판에 의하면 1781년에 명정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영조실록(英祖實錄)』 23년 11월 28일조 기사에 의하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김승규의 정려를 청하여 왕이 이것을 허락하였다고 되어 있어, 1781년보다 이른 시기인 1747년(영조 23)에 이미 명정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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