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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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宗瑞 |
영어공식명칭 | Gim Jongseo |
이칭/별칭 | 국경,절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태산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강경윤 |
출생 시기/일시 | 1383년(우왕 9) - 김종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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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05년(태종 5) - 김종서 과거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33년(세종 15) - 김종서 함경도 도절제사로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440년(세종 22) - 김종서 형조판서가 됨 |
활동 시기/일시 | 1441년(세종 23) - 김종서 예조판서가 됨 |
활동 시기/일시 | 1446년(세종 28) - 김종서 우찬성으로 승진되고 판례조사를 겸함 |
몰년 시기/일시 | 1453년(단종 1) - 김종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46년(영조 22) - 김종서 관작 추복 |
추모 시기/일시 | 1791년(정조 15) - 김종서 장릉 배식단에 추향 |
출생지 | 김종서 출생지 -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
묘소|단소 | 김종서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대교리 밤실마을 산45 |
사당|배향지 | 숙모전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산국립공원 |
사당|배향지 | 요당서사 - 충청남도 공주시 |
사당|배향지 | 충렬사 - 함경도 종성 |
사당|배향지 | 겸천사 - 전라남도 순천시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순천 |
대표 관직 | 예조판서 |
[정의]
조선 전기 세종 지역 출신의 문무를 겸전한 인물.
[개설]
김종서(金宗瑞)[1383~1453]는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서 1383년(고려 우왕 9)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국경(國卿)이고 호는 절재(節齋)이다.
김종서는 백성을 자애로 다스리는 목민관(牧民官)이었으며, 세종(世宗)·문종(文宗)·단종(端宗) 3대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고 항상 강직하고 엄정하게 실무를 처리하였다. 당대 최고의 문신 학자군을 이룬 집현전 학사들을 지휘하여 『고려사』 편찬을 주도하였고,『고려사절요』를 편수(編修)[책을 편집하고 수정함]하는 책임을 맡는 등 뛰어난 문인 학자적 능력을 발휘한 전형적인 문관(文官)이었다.
그러나 김종서라는 인물을 대변하는 단어는 ‘장군’이다. 김종서는 문신이면서도 성격이 호방(豪放)하고 기개가 있었으며 지략(智略)에도 밝아 무인적(武人的)인 기상을 아울러 갖춘 인물이었다. 무인적 기상 때문에 세종 대에는 명을 받아 압록강 상류에 4군(四郡)을 설치하고 두만강 유역에 6진(六鎭)을 개척하여 북방의 강역을 넓히는 불후의 큰 업적을 쌓았다.
김종서는 일생 동안 전투를 지휘한 장군이 아니라 군사 문제를 지휘하는 문관 지휘관이었다. 김종서가 장군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김종서는 전형적인 문무를 겸비한 관료였다.
[가계]
김종서는 아버지 김수(金陲)와 어머니 성주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종서의 부인은 파평윤씨 윤원보(尹元富)의 딸이다. 슬하에 아들 김승규(金承珪)·김승벽(金承璧)·김승유(金承琉)와 세 딸 그리고 서자 김석대(金石臺)와 김목대(金木臺)를 두었다. 순천김씨가 세종 지역에 터를 잡은 것은 김종서의 할아버지 대로 생각된다.
[활동 사항]
김종서는 1405년(태종 5) 18세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다. 강원도 지방 감찰을 행대감찰의 직을 띠고 나가 빈민의 상황을 자세하게 보고하면서부터 왕의 신임을 받기 시작하였다.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가장 큰 활약은 1433년(세종 15)에 함경도 도절제사로 부임하여 6진을 개척한 일이다. 김종서는 부임하자마자 경원부를 설치하여 함길도 남쪽의 백성을 이주할 계책을 상달하여 허락을 받고 지방 토관(土官)을 평양부와 같은 수준으로 설치하였다. 국경을 두만강까지 확보하려는 세종의 뜻에 따라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경원·종성·회령·경성·온성·부령 등 6진(六鎭)을 개척하여 우리의 영토로 만드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김종서는 1440년(세종 22)에 7년간의 함길도 외방직에서 벗어나 형조판서로 승진하여 재상으로 활동하였다. 다음 해에는 예조판서를 거쳐 재상으로서 국정을 논의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1446년(세종 28) 1월에 우찬성으로 승진하였으나 재상들의 행정 능력을 살리기 위하여 예조판서보다 상위직인 판례조사(判禮曹事)를 겸하였다. 국장도감의 제조와 사복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문종이 2년 만에 숨지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수양대군은 한명회·권남과 더불어 왕위를 탈취하려는 목적으로 계유정란을 일으켰다. 수양대군은 당시 큰 호랑이(大虎)라고 칭한 김종서의 집에 직접 가서 철퇴로 때려 죽이려 하다가 아들인 김승규가 철퇴에 맞아 순절하였다. 암살을 피한 김종서는 다음 날 참살(斬殺)[칼로 목을 베어 죽임]되었다.
[학문과 저술]
김종서는 지춘추관사로 기전체의 『고려사』 139권을 편찬하여 국초 이래 다섯 번이나 고쳐 편찬한 『고려사』의 정리에 종결을 짓고 편년체의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주청(奏請)[임금에게 아뢰어 청하다]하여 마무리지었다.
[묘소]
김종서의 묘소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대교리 밤실마을 산45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김종서의 묘소가 장군면 대교리에 자리 잡게 된 것과 관련하여 전설이 있다. 김종서 장군에게는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말이 한 마리 있었는데, 1453년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여 능지처참하자 광경을 보고 있던 말이 갑자기 뛰어들어 김종서의 다리 한쪽을 물고 한양을 뛰쳐나와 김종서의 고향인 세종 지역까지 쉬지 않고 달려와서 죽었다고 한다. 말이 물고 온 한쪽 다리를 대교리에 묻고 그 후부터 마을 이름을 ‘한다리’라고 부르게 되었고, ‘한다리’가 변하여 ‘대교리(大橋里)’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상훈과 추모]
김종서는 어린 단종의 왕위를 지켜 주려다가 수양대군에 의하여 철퇴를 맞고 쓰러져 사림 정신의 표상이 되었다. 숙종 대에 신원 복권이 시작되었고 영조와 정조 대에 김종서를 비롯한 황보인과 정분 등 삼상(三相)에 대한 선양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746년(영조 22) 12월 27일에 김종서를 비롯한 삼상의 관작(官爵)[관직과 작위]이 추복(追復)[빼앗았던 위호(位號)를 그 사람이 죽은 뒤에 다시 회복하여 줌]되었다. 추복된 지 6일이 지난 1747년(영조 23년) 1월 2일에는 영의정 김재로의 차자(箚子)[상소문]에 의하여 황보인·김종서와 함께 죽은 여러 신하들도 복관(復官)[물러났던 관직에 다시 돌아오게 함]함으로써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와 김승벽도 복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719년(정조 15)에는 장릉에 배식단을 세우고 『어정배식록』을 편찬하였다. 순조 4년에는 황보인·김종서·정분 등 단종조의 삼상에 대한 작설(綽楔)의 법[정려 건립]이 베풀어졌다.
현재 김종서 장군 묘 아래에는 김종서와 김승규의 정려(旌閭)[충신·효자·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가 세워져 있다. 김종서를 제향(祭享)하는 서원으로는 숙모전·요당서사·충렬사[함경도]·겸천사[전라남도 순천] 등이 있다. 숙모전과 요당서사는 공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