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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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密陽朴氏五忠旌閭 |
영어공식명칭 | Miryangbakssi Ochungjeongryeo |
이칭/별칭 | 밀양박씨오충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미꾸지길 9-3[예양리 2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건립 시기/일시 | 1747년(영조 23) - 밀양박씨 오충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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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20년 - 밀양박씨 오충 정려 이전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8년 - 밀양박씨 오충 정려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97년 - 밀양박씨 오충 정려 중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1년 05월 31일 - 밀양박씨 오충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1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밀양박씨 오충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 지정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밀양박씨 오충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1호 지정 해지 |
현 소재지 | 밀양박씨 오충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미꾸지길 9-3[예양리 21] |
원소재지 | 오충각 - 충청남도 연기군 서면 월하리 |
성격 | 정려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밀양박씨 문중 |
관리자 | 밀양박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예양리에 있는 밀양박씨 5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정려.
[개설]
밀양박씨 오충 정려(密陽朴氏五忠旌閭)는 충청도 연기군 북이면 두옥동(斗玉洞) 혹은 두도동(斗櫂洞)[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월하리] 출신으로서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에서 전사한 박천붕(朴天鵬)[1545~1592]과 병자호란 때 전사한 그의 네 아들 박원겸(朴元謙)[1582~1637], 박인겸(朴仁謙)[1584~1637], 박예겸(朴禮謙)[1586~1637], 박의겸(朴義謙)[1591~1637]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
박천붕은 본관이 밀양, 자는 익호(翼乎), 호는 규정(樛亭)이다. 1554년(명종 9) 충청도 연기군 북이면 신리 두옥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박령(朴笭), 어머니는 청주한씨이다.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1571년 27세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훈련원참군(訓練院參軍)이 되었다. 1587년(선조 20) 스승인 조헌이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옥천으로 낙향하자 박천붕도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두옥동으로 내려와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조헌의 종사관이 되어 8월 청주의 상당산성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순국하였다.
박천붕은 익성공(翼城公) 황희(黃喜)의 후손인 황달효(黃達孝)의 딸을 아내로 맞아 슬하에 박원겸, 박인겸, 박예겸, 박의겸의 네 아들을 두었다. 네 아들은 모두 충청병사 이의배(李義培)의 막료로 들어가 활약하다가 1637년 죽산산성 전투에서 모두 순절하였다.
[위치]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소재지에서 591번 지방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2.5㎞ 정도 가면 도로 동쪽으로 예양리가 나온다. 이 마을은 덕을 기르고 배우는 곳이라 하여 의곡(養谷)·인동·양골이라고도 하며, ‘미꾸지’라고도 불린다. 밀양박씨 오충 정려는 이 마을 북쪽 구릉의 남향 사면 말단부에 자리한다.
[변천]
박천붕의 네 아들이 1637년 죽산산성에서 모두 순절하자 당시 연기현감 백대기는 박천붕을 비롯한 5충신에 대하여 ‘제오충유허문’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 전장에 나가 싸운 조헌이나 충청병사 이의배가 모두 순절함으로써 그들의 충정을 조정에 보고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자손들 역시 모두 어린데다, 곧이어 호서와 호남 지방으로 흩어짐에 따라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711년(숙종 37) 연기 지역 사족들이 연명으로 5부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순무사에게 정려 포장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포장받지 못하고 지연되었다. 몇 년 뒤에 다시 연기현감에게 포장을 청하는 상서를 올렸다. 이 상서에서 연기 사족들은 향중의 공론을 감안하여 감영에 보고하도록 청하였다. 당시 연기현감은 상서에 대한 데김[題辭]에서 박천붕 5부자의 충의 행적이 인멸됨을 아쉽게 생각하여, 이 내용을 순영에 건의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밀양박씨 문중에서는 1746년(영조 22) 박천붕과 네 아들의 순절 사실기를 담은 『오충실기』를 편찬하였는데 그 서문에 아직도 포장을 받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1747년(영조 23) 충신 명정을 받았다. 그러나 명정을 받은 사람은 박천붕과 막내아들 박의겸뿐이었다. 기우만(奇宇萬)[1846~1916]이 지은 『송묘선생문집(松沙先生文集)』의 「박씨오충기실(朴氏五忠記實)」에는 영조 정묘년에 박천붕과 박천붕의 계자(季子)[막내아들] 주부 박의겸에게만 정려가 내려져 의로운 행실은 같으나 포상은 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박천붕의 정려는 연기에 있고 박의겸의 정려는 전라도 보성에 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현재 전라남도 담양군에 오충 정려와 같은 정려가 세워져 있다.
정려는 1747년 명정을 받아 충청도 연기군 북이면 두옥동[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월하리]에 세워졌고, 마을 이름도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충효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1920년에는 두옥동의 정려를 후손들이 모여 사는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 예양리[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예양리]의 현 위치로 옮겼고, 1988년 충청남도 연기군의 보조를 받아 중수하였다.
[형태]
현재의 밀양박씨 오충 정려는 1997년에 중수된 것이다. 3단으로 돌을 쌓아 높게 만든 기단 위에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세워져 있다.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화강석재를 가공한 8각고주 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이익공 양식을 보이고 있고, 양 측면의 박공 밑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밀양박씨 오충 정려 주변으로는 돌담이 형성되어 있다.
[현황]
밀양박씨 오충 정려의 4면에는 홍살을 돌리고 정면에 출입문을 만들었다. 밀양박씨 오충 정려 상단부에는 ‘오충각(五忠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내부 중앙 상단에는 박천붕의 현판[忠臣 通訓大夫行漢城參軍 密陽朴公天鵬之閭 英宗丁卯八月 日 命旌], 왼쪽에는 박원겸의 현판[忠臣 通訓大夫行判官 密陽朴公元謙之閭]과 박의겸의 현판[忠臣 通訓大夫行軍資監主簿 密陽朴公義謙之閭], 오른쪽에는 박예겸의 현판[忠臣 通訓大夫行軍資監僉正密 陽朴公禮謙之閭]과 박인겸의 현판[忠臣 通訓大夫行宣傳官 密陽朴公仁謙之閭]이 각각 걸려 있다.
박천붕의 명정 현판 앞쪽에는 후손인 박광진이 지은 중수기(95×46㎝), 뒤쪽에는 1904년 송환기가 쓴 중수기(90×36㎝)가 걸려 있다. 밀양박씨 오충 정려 내부 바닥에는 16세손 박석흥(朴錫興)이 찬한 「양세오충기적비(兩世五忠紀積碑)」(60×24.5×147㎝)가 세워져 있다. 한편 밀양박씨 오충 정려 왼쪽에는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1997년 삼성전기 조치원 사업장에서 기증한 누각이 세워져 있다. 밀양박씨 오충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밀양박씨 오충 정려는 양세에 걸쳐 국환에 충정을 다하여 순국한 다섯 명의 선조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정려로, 후손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