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12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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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將軍面全州李氏德泉君派同族組織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에 있는, 정종 10남 덕천군 이후생의 후손이 이거·정착한 집성촌.
[개설]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의 전주이씨 덕천군파는 덕천군(德泉君)이후생(李厚生)[1397~1465]의 후손들이다.
덕천군은 정종의 10남으로, 덕천군파가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일대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공주·연기 일대에 덕천군의 전장(田莊)[개인이 소유하는 논밭]이 있었기 때문이다.
덕천군은 항상 검약하고 농사일을 좋아하여 충청도 공주에 전장을 두고 정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어느 해에 장마로 금강물이 범람하여 수재민이 생기자 가산을 털어 사람을 구하였다는 일화가 신도비(神道碑)에 기록되어 있다.
1465년(세조 11) 덕천군이 별세한 후 후손이 번성하였다. 판서 이진망(李眞望)이 숙종조, 대제학 이광덕(李匡德)이 영조조에 각각 상주하여 포장의 성은을 입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부조묘(不祧廟)[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의 향화 제수를 공주목에서 마련하여 영구히 지급하도록 제도화하는 하명이 있었다고 한다.
덕천군에게는 4남 6녀가 있었다. 장남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1433~1487]의 여덟째 아들 상산군의 손자인 진주목사 이몽경(李夢慶)[1538~1624]이 공주 입향조이다. 그리고 종손이 떠돌이로 살아 연기에 있으면서 거의 제사도 끊기게 되었다. 공주 의당 태산리의 이광세(李光世)·이광언(李光彦) 등과 이진급(李眞伋)이 공주 의랑리에 살고 있으며, 문행이 많았다. 결국 방축리에 있던 부조묘를 1723~1739년 어간(於間)[시간이나 공간의 일정한 사이]에 후손이 다수 거주하는 공주로 이건해서 전답을 마련하여 종손을 살게 하고, 제사가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다.
[입향경위]
전주이씨 덕천군파는 경기도 양주(楊州) 지역에 세거하였으나 임진왜란 당시 난을 피하여 낙향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분명한 기록이 없지만 현재 사우(祠宇)[사당]가 위치한 공주 의랑(儀郞) 지역은 이몽경(李夢慶)[1538~1624]의 외향(外鄕)으로 추정된다. 이몽경의 어머니인 신부인(愼夫人)[조선 시대에 정삼품 당상관 종친(宗親)의 아내에게 주던 외명부의 품계] 이씨가 공주이씨(公州李氏) 병사 이예(李藝)의 딸이라는 점, 사우가 있는 마을의 옛지명인 ‘신대(新垈)’는 공주이씨들의 세거지였다는 점 등이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변천]
세거지는 장군면 일대에 조성되어 있다. 특히 덕천군사우가 위치한 태산리를 중심으로 송학리·용현리 및 인근 공주시 의당면과 금흥동 등지에 여러 파가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덕천군파 세거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장군면 태산리는 덕천군사우가 위치한 곳이며, 오랫동안 덕천군의 후손이 세거하여 온 전통마을이다.
공주 입향조인 목사공 이몽경과 장남 참판공 이제(李濟)의 묘역도 장군면에 있으며, 처음 터를 잡은 곳이라 전한다.
[덕천군 관련 유적]
장군 덕천군 사우[덕천군 부조묘]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태산리[옛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태산리]에 있는 사우이다. 연기·공주 지역에는 본래 덕천군의 전장이 있었다. 금강의 홍수로 많은 수재민이 발생하자 수재민들을 구제하였다는 기록도 있어 덕천군이 생전에 공주와는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이 같은 인연으로 인하여 후손들이 연기 방축리로 이거(移去)[거주지를 다른 곳으로 옮김]하고 사우를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1654년(효종 5)에 백헌 이경석(李景奭)이 연기군 남면 방축리의 사당을 살핀 뒤 훼손되어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사우를 중수(重修)[건축물 등의 낡고 헌 것을 손질하며 고침]하고 제전(祭田)[조상의 제사를 받들기 위하여 설정한 논밭]을 마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677년(숙종 3) 후손인 이덕주(李德周)가 충청감사로 부임하였을 때 사우를 중건하였고, 1704년(숙종 30) 후손 이덕성(李德成)이 충청감사로 부임하여 다시 중수하고 제전을 정비하였다고 한다. 그뒤 황해감사 이진망과 평안감사이진검 등이 후원하고 이진급(李眞伋)이 물자를 모아 1739년에 이르러 전면적인 사우 중건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1790년(정조 14)에는 이조판서 이면긍, 이조판서 이면승, 승지 이면구 등이 다시 한 번 중수를 이끌고 종인(宗人)[촌수가 아주 먼 일가]들의 협심(協心)[여럿이 마음을 하나로 모음]으로 재실(齋室)[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을 건축하였다. 1878년(고종 15)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이건창(李建昌)이 사우의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고, 일제강점기에 재실을 건축하였다. 1960년과 1980년 대대적인 중수 후 1990년대에 강당을 신축하였다. 2001년 사우와 담장 보수 등 중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최근 관리사 일부를 신축하였다.
부조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구조로, 맞배지붕이다. 정면에 ‘덕천군사우(德泉君祠宇)’ 현판이 걸려 있다.
내부에 덕천군과 군부인(郡夫人)[조선 시대에 왕자군(王子君)이나 종친의 아내에게 내리던 외명부의 봉작] 이씨의 1872년 추봉교지를 복제하여 걸어 두었고, 위패를 모시고 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61호에 지정되었고, 태산리가 세종특별자치시에 편입된 후 2012년에는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6호로 변경 지정되었다. 사우 뒤편에는 덕천군의 신도비와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덕천군의 묘와 신도비는 본래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거여리에 있었는데 6·25전쟁 후 군용지로 편입되어 1974년 태산리로 이장하고 석물도 그대로 옮겨 세웠다. 봉분의 뒤로 곡장이 둘러져 있다. 석물 중 양쪽의 문인석, 석등, 묘비 2기는 당대의 것이다. 구 묘비는 복련형으로 조선 전기의 묘비 형태이며, 석등도 구 묘비와 같은 재질과 조각 솜씨를 보이고 있다. 문인석도 왕가의 묘역을 지키는 석물답게 근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조선 초기 문인관료의 복식이 보이며, 큰 눈과 큰 귀 등의 형태가 이채롭다.
한편 신도비는 묘역 입구의 정면·측면 각 1칸의 비각 내에 세워져 있다. 1754년(영조 30) 원교 이광사(李匡師)[1705~1777]가 신도비문을 지었으나 건립이 지연되다가 50여 년이 지난 1808년(순조 8)에 건립되었다. 비신의 높이 250㎝, 폭 77㎝, 두께 45㎝이다.
[현황]
송학리 은곡동에는 돈와공 이형(李泂)의 묘와 재실이 조성되어 있고, 돈와공파 후손들이 거주한다. 태산리 남쪽의 용현리에는 집의공 이담(李湛)의 묘와 재실이 있다.
공주시 금흥동의앵봉산 남쪽 끝자락에는 돈와공파 이정철·이기성 등의 묘가 있다. 이정철과 이기성 부자는 1600년대 중반 백헌 이경석과 1722년에 도운 이진망이 연기의 사우를 새로 고칠 때 각각 주도적으로 협력한 인물이다.
태산리에는 2010년 송림군 종회에서 재물을 내어 건립한 종손댁이 있다. 태산리 종손댁에는 종손 이용구 씨가 거주하고 있다.
사우 주변에 강당과 추모전·송덕비·홍살문 등이 조성되어 태산리가 덕천군파 세거지임을 알려준다.
덕천군 묘소와 사우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에 묘제(墓祭)[무덤 앞에서 지내는 제사]를 봉행한다. 또한 음력 11월 10일에는 덕천군사우제, 매년 음력 11월 21일에는 군부인 사우제를 각각 봉행한다.
[의의와 평가]
전주이씨 덕천군파 부조묘는 지역에 있는 특별한 사례로, 공주시·세종특별자치시와의 인연과 지역에서의 사족 활동을 보여 주는 중요한 문화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