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3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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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關王廟 |
영어공식명칭 | Shrine to Generral Kuan Yu, Seongju |
이칭/별칭 | 성주 관왕묘,관성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길 38[경산리 526-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은정 |
조성 시기/일시 | 1598년 - 관왕묘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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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 시기/일시 | 1727년 - 관왕묘 성주군 성주읍 동문 밖에서 경산길 38[경산리 526-6]로 이전 |
개축 시기/일시 | 1987년 8월 15일 - 관왕묘[관성전] 중수 |
현 소재지 | 관왕묘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길 38[경산리 526-6] |
원소재지 | 관왕묘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
성격 | 사당 |
양식 | 맞배지붕 목조 건물 |
봉분 크기/묘역 면적 | 3칸[정면]|3칸[측면]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관운사에 있는 조선 후기 사당.
[개설]
관왕묘(關王廟)는 중국 촉나라 장수 관우(關羽)[?~219]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를 올리던 곳으로, 현재 관운사(關雲寺) 경내 좌측에 자리한다.
[위치]
관왕묘는 성주군 성주읍 경산길 38[경산리 526-6번지] 관운사 경내 좌측에 있으며, 성주여자고등학교와 성주중앙초등학교 사이에 자리한다. 남쪽으로 250m 떨어져 이천(利川)이 동류하여 백천(白川)과 합수한다.
[변천]
관왕묘는 중국 삼국 시대의 명장인 관우를 모시기 위해 건립한 사당으로, 1598년(선조 31)에 명나라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성주성 전투(星州城戰鬪)에서 승리한 후 어명을 받아 건립하였다. 처음에는 성주읍 동문 밖[현재 종로]에 건립하였으나, 잦은 수해를 피하기 위해 1727년(영조 3)에 남정 아래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숙종실록』에 1711년(숙종 37)에 경상도관찰사의 장계(狀啓)에 따라 관왕묘를 이건하고 소상(塑像)도 개조하라는 명이 기록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및 6.25 전쟁을 겪으면서 사당을 제외한 건물이 전소하였다. 이후 1964년 그 자리에 사찰 관운사가 세워졌고, 1987년 8월 15일에 관성전을 중수하였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목조 건물이다. 향사 때 사용하던 석조 화대가 남아 있는데, 방형의 석조 화대 크기는 현고 52㎝, 폭 67㎝로 현재 관성전 전면 우측에 있다.
[현황]
1987년에 중수한 관성전 내에는 무형 문화재 목조각장 보유자 박찬수가 제작한 목조 관우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창을 들고 있는 주창이, 왼쪽에 관인함을 들고 있는 관평이 서 있다. 관왕묘 앞쪽 절 입구에 세워진 하마비(下馬碑)에는 ‘대소인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누구든지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가 새겨 있다.
[의의와 평가]
관왕묘는 중국의 명장 관우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를 지내는 사당이다. 우리나라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전후하여 서울 남관왕묘(南關王廟)가 처음 세워진 후, 지방에는 현재의 성주군과 강진군, 안동시, 남원시 등지에 세워졌다. 관왕묘는 관우의 충정과 절의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여 국가 권력을 안정화하려는 당대의 통치 방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