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1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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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關雲寺-由來 |
영어공식명칭 | Origin of Gwanunsa |
이칭/별칭 | 「관왕묘」,「관왕묘의 전설」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다원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에서 관운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관운사의 유래」는 성주군 성주읍에 소재한 관운사(關雲寺)와 관련해 전하는 사찰 유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6년에 성주군에서 간행한 『성주군지』에 「관왕묘(關王廟)」, 「관왕묘의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용]
관운사는 와우산에 자리하는데, 와우산이라는 이름은 지형이 와우첨성(臥牛瞻星)으로 ‘누운 소가 별을 보고 일어나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졌다. 이곳은 서출 동류하는 이천(利川)의 강물이 가야산(伽倻山)에서 낙동강으로 합류하며 성산(星山)[별산]을 안산으로 하고 있어, 옛부터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전한다. 관운사는 중국에서 유명한 인물인 관우(關羽)와 관련해서 지어진 절이라 특이한 성격을 지닌다. 관우는 중국 후한 말 삼국 시대 촉한의 선제인 유비(劉備)의 의제(義弟)[의리로 맺은 아우]이자, 무장(武將)으로 후에 오(吳)의 여몽(呂蒙)의 계락에 빠져 전사한 관성제(關聖帝)를 가리킨다. 후세의 무인들이 관성제를 무신(武神)으로 추앙하며 전쟁의 승리와 국가의 태평,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전당으로 관왕묘를 건립하였다. 우리나라에는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명나라 장수인 모국기(茅國器), 조승훈(祖承訓)과 노득공(盧得功) 등 3명이 처음 성주읍 동문 밖에 관왕묘를 세웠다. 이후 1727년(영조 3)에 관왕묘를 큰배리 마을의 남정 밑으로 옮겼다. 이건(移建)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처음 관왕묘를 세운 자리가 하천과 가까웠는데, 하천과 가깝다 보니 항상 홍수 때 수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1727년 당시 성주목사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 이전을 청하였으며 그 이후 이건하였다고 한다. 관왕묘 중앙에는 관우의 소상(塑像)[찰흙으로 만든 사람 형상]을 두었고, 좌우에는 명나라 장수로서 정유재란 당시에 희생된 이신방과 모승선, 장표의 상을 종행으로 안치하였다. 봄에는 경칩에, 가을에는 상강(霜降)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고 한다. 속전에는 여씨(呂氏) 성을 가진 사람이 관왕묘를 참배하면 횡액을 입는다고 한다. 강당을 따로 지어 군인들의 훈련장으로 이용하였다고도 전하며, 일제 강점기에 소상을 강제로 헐어 폐하였는데 건물은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6.25 전쟁 이후 1963년에 승려 지산이 이 터가 영험이 있는 도량임을 알고 관운장 승모회를 찾아가, 이곳에 관운장을 모실 테니 사찰로 사용하도록 승낙해 달라고 요청해 관운사가 세워졌다고 전한다.
[모티프 분석]
「관운사의 유래」의 주요 모티프는 ‘영험함’이다. 중국의 인물인 관우가 1727년에 조선 성주목사의 꿈에 나타나 터를 옮겨 달라고 요청한 부분이 영험함을 인지시켜 주는 구실을 한다. 전승 집단은 관운사의 우수함을 ‘영험함’의 모티프를 통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