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1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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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不義-抗拒-徹底-精神-一貫-心山金昌淑 |
영어공식명칭 | Shimsan Gim Chang-suk, Who Consistently Resisted Injustice with A Thorough Seonbi[Scholarly] Spirit |
이칭/별칭 | 문좌(文佐),직강(直岡),심산(心山),벽옹(躄翁),우(愚)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신태수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출신으로 평생을 독립운동과 반독재 운동에 헌신한 인물.
[개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은 평생을 불의에 항거하는 데 바친 인물로서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논할 때 사표(師表)로 언급된다.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 마을에서 태어난 김창숙은 본관이 의성(義城)으로서,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외손서(外孫婿)이자 고족제자(高足弟子)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의 13세 종손으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후예이기에 유학에 의한 습윤(濕潤)을 받았으면서 자기 수양의 유교적 틀에 갇히지 않고 불의에 맞선 행동주의자로 한평생을 살았다. 생애의 전반에서 유교가 삶의 준거가 되고 있으면서도, 봉건주의를 극복하려 애쓰고 관념보다 실천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고 민족 분단에 반대하고 독재 정치에 항거하였다.
이러한 일관된 삶의 이면에 자신은 물론 가족의 희생이 뒤따랐다. 자신은 불구의 몸이 되고 두 아들을 독립운동으로 잃었기에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가혹하리만큼 힘들게 살았다. 여느 독립운동가가 다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김창숙의 경우는 비극의 정도가 비할 바 아니었다. 1962년 5.16 군사 정부 시절 건국공로훈장중장(建國功勞勳章重章)을 수여 받았는데, 해방 후 생존 독립지사가 받은 유일한 건국 공로 훈장이었다.
[구국 운동의 시작과 방황]
이러한 삶의 밑바탕은 아버지 하강(下岡) 김호림(金頀林)[1842~1896]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스스로도 첫 번째 스승으로 꼽은 아버지에게서 탈중세적 신분 의식과 국가 의식을 배운 김창숙은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현실 참여에 나섰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대한 처형을 직접 상소하였다. 또한 친일 단체 일진회(一進會)에 대한 처단을 주장하다가 수감되기도 하였다.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나자 전국단연동맹회(全國斷煙同盟會) 성주 대표가 되어 국채 보상 기금을 마련하는 데 앞장섰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 모금액이 친일파의 수중에 들어갈 것을 알아채고는 그 돈으로 청천서당(晴川書堂)에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세워 신교육 운동에 앞장섰다. 김창숙은 애국 계몽 운동으로 계몽 단체 대한협회 성주지회를 결성하기도 하였으나, 1910년 조선이 일본에 병탄되자 세상에 사는 것이 부끄럽다면서 의관을 찢어버리고는 3년 가까이 음주와 미치광이 행동을 일삼았다. 어머니의 간곡한 호소를 받아들여 5년간 독서와 공부에 몰두하였다.
[1, 2차 유림단 의거와 무력 투쟁]
3.1 운동의 민족 대표 33인에 유림 출신이 빠졌음을 통탄한 김창숙은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성주 백세각(百世閣)[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에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 등과 함께 한국 독립 청원 장서(韓國獨立請願長書)를 작성하였다. 기호 지방의 유림을 포함한 전국 유림 대표 137명의 서명을 받은 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 프랑스 파리의 강화 회의로 장서(長書)를 보냈다. 이때 어머니가 아들을 꾸짖은 말이 유명하다.
“천하의 일을 경영하면서 어찌 가정을 잊지 못하느냐!”
김창숙은 장서를 한 줄씩 자르고 꼬아서 짚신으로 만들어 중국으로 잠입하였고 영역(英譯)해 파리로 보내는 등 파리 장서 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에 일제는 곧 국내 유림을 탄압하여 500여 명을 체포하였는데, 이것이 제1차 유림단 의거이다. 이후 일경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김창숙은 상하이로 가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산하 단체들의 갈등과 다툼으로 임시 정부 활동이 지지부진해지고 이승만(李承晩)이 미국의 힘을 이용한 독립운동을 추구하자 김창숙은 임시 정부를 떠나게 된다. 베이징[北京]으로 와서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독립운동지 『천고(天鼓)』를 발행하고, 만주 독립운동의 해외 기지 건설로 활로를 개척하고자 하였다.
중국 측의 협조를 얻어 치치하얼[齊齊哈爾]에 대지 9만 9473.55㎡[3만평]를 확보하고는 국내로 들어와 유림과 부호를 대상으로 자금 모금에 나섰다. 일제는 이를 막기 위하여 600여 명의 유림을 검거하였으니 이른바 ‘제2차 유림단 의거’이다. 일제의 문화 정치 아래 식민의 상황이 지속되면서 모금이 여의치 않자, 국내 인사들의 의식을 깨우치고자 친일파 처단과 일제에 대한 무력 투쟁으로 선회한 김창숙은 1926년에 나석주(羅錫疇)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폭탄 투척 사건을 주도하였다.
[투옥과 고문으로 인한 병세 악화와 연이은 불행]
김창숙은 맏아들 김환기(金煥基)를 일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잃게 된다. 아들을 독립운동가로 양성하기 위해 중국으로 불렀다가 병에 걸리자 하는 수 없이 귀국시켰는데 일경이 체포·구금해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그때 아들 나이 스무 살이었다.
아들을 잃은 충격은 피해 숨어 지내면서 활동하느라 지병을 치료하지 못한 김창숙의 병세를 악화시켰다. 이에 1927년 2월 상하이 조차지(租借地)에 있는 영국인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일경의 밀정인 옛 제자들의 밀고로 6월 10일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대구의 옥중에서도 투쟁을 계속하다가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중병 끝에 하반신이 마비되어 불구가 되었다. ‘벽옹(躄翁)’이라는 호는 바로 앉은뱅이라는 뜻이다.
김창숙은 주변의 간곡한 권유에도 변호를 거부한 채 재판을 받아 1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형량은 다른 독립운동가와 비교할 때 매우 무거운 것이었다. 1928년 10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제2호 형사 법정에서 본적을 묻는 판사의 말에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며 자신을 포로라고 말하였다. 당시 지은 시에 김창숙의 굳건한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모사아망가이복(母死兒亡家已覆)[어머님은 돌아가시고 자식도 죽어 집은 이미 쓰러지고]
처제부곡몽유경(妻啼婦哭夢猶驚)[아내와 며느리 울음소리 꿈결에도 소스라치네]
기구방득도하락(崎嶇枋得逃何樂)[기구한 사방득(謝枋得)은 도망한들 즐거운 곳이 어디이며]
강개천상사역영(慷慨天祥死亦榮)[강개한 문천상(文天祥)은 죽어도 영광을 얻었도다]
화복궁통원유명(禍福窮通元有命)[인간의 운명은 원래 하늘에 매였으니]
병부비시구구생(病夫非是苟求生)[병든 이 몸은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노라]
이 기간에 둘째 아들 김찬기(金燦基)도 투옥되어 고문을 받는 등 시련이 연이었다. 김창숙은 옥중에서 독립의 요원함에 대한 울분과 가족의 불행에 대한 비통함을 독서와 저술로 달래었다. 『자서종요(字書綜要)』를 편찬하고, 『육경(六經)』·『이정전서(二程全書)』·『이학종요(理學宗要)』 등 경서와 성리서를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김창숙은 독립에 대한 의지는 굳건하였지만 비통하거나 부정적인 상황에서의 순간적 좌절은 피할 수 없었다. 종손으로서 가문을 관리하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과 자식의 불행을 막지 못한 데 대한 애통함은 수시로 그를 괴롭혔다. 이러한 심리적 하강은 옥중에서 지은 시[獄中作]에 자탄(自歎)으로 잘 나타나 있다.
김창숙은 1934년 9월 병으로 가출옥해 대구 둘째 아들의 집에서 조리하였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아내와 다시 헤어지고 고문으로 죽은 큰아들에 이어 둘째 아들마저 고문으로 인한 병으로 한참 동안 요양하러 가 있었기에 비통함이 극에 달하였다. 게다가 독립운동을 계속 추진하지 못했으므로 좌절감도 심하였다. 이때 지은 한시에 그러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처쇠저사귀산리(妻衰底事歸山裡)[처는 늙어 그 일로 산속으로 돌아가고]
아병다시와해빈(兒病多時臥海濱)[아이는 병이 들어 바닷가에 누웠도다]
구국의관여체사(舊國衣冠餘涕泗)[옛 나라의 의관에 눈물만 남았는데]
수가사죽잡훤진(誰家絲竹雜喧嗔)[누구 집에서 사죽(絲竹)이 요란하게 울리는가]
잔등강인배중물(殘燈強引盃中物)[까막까막하는 등불 아래 억지로 술잔을 들어 마시니]
백강회황부매인(百感徊徨不寐人)[온갖 감회에 서성거리며 잠 못 이루네]
당시 김창숙은 출소 후에도 일경의 감시를 받고 있었는데, 와병 중임에도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지속적으로 관여하였다. 불구의 김창숙을 돌본 이는 둘째 며느리인 손응교로, 양동 마을 출신 독립운동가 손후익(孫厚翼)[1888~1953]의 딸이었다. 17세에 시집와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시아버지와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일찍 남편을 여읜 후에도 시집의 가문을 지킨 김창숙의 삶에 대한 산증인이었다. 손응교 여사는 아들을 업고 다니면서 시아버지의 연락책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만주와 중국을 3차례, 국내는 30여 차례를 다녔다고 한다.
1936년 2월 김창숙은 요양차 울산의 백양사에 가서 몇 년 동안 지냈다. 이때 김창숙을 돌본 사람은 당시 백양사에서 수도(修道)하고 있던 차대운으로서 아무 연고가 없는데도 물심으로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김창숙은 1940년 62세의 나이로 고향에 돌아와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에 불효의 죄를 고하고 불편한 몸으로 삼년상을 치렀다.
[해방을 맞이하다]
김창숙은 1945년 8월 7일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활동했다는 죄목으로 다시 투옥되었다가 일주일 만에 옥중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해방이 되었으나 중국 임시 정부에 밀파(密派)했던 둘째 아들은 광복 직후에 세상을 뜨게 된다. 며느리 손응교 여사의 말에 의하면, 17세부터 아버지를 도와 독립운동에 투신한 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받아 든 김창숙은 수없이 편지를 읽기만 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 아들의 시신은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이 귀국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유학의 진흥에 앞장서다]
거유(巨儒)의 후예인 김창숙은 일제가 친일로 오염시킨 유림계를 바로잡고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일제에 의해 격하, 폐교된 성균관의 부활을 추진하였다. 1945년 11월 전국 유림 대회를 열어, 성균관대학교 설립에 대한 뜻을 집결하고 필요한 토지와 기금을 모으는 등 노력 끝에 1946년 9월 정식 인가를 받았다. 성균관장을 겸하는 초대 학장으로 김창숙이 취임하였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정문의 왼쪽에 불굴의 의지로 항거하는 김창숙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후 김창숙을 기념하는 ‘심산연구회’의 발족도 성균관대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반분단 통일 운동과 반독재 투쟁]
광복이 되자 김창숙은 자주독립과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불구의 몸에도 쉬지 않았다. 고향에서 친일 세력의 통치를 막고자 ‘임시치안유지회’를 결성하고 대구에서 좌우 세력을 통합하고자 애썼다. 영남과 호남의 인사들이 만든 민중당의 당수로 추대되었으나 정당의 난립은 민족 통합에 방해가 될 뿐이라면서 스스로 현실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1946년에 비상국민회의 8위원이 되었으나 이승만에 반대하여 나왔다. 그 후 신탁 통치 반대, 공산주의 반대 투쟁을 추진하였다.
6.25 전쟁 직후 서울에 남았던 김창숙은 북한의 사상 전향 요구를 거부하고, 부산으로 내려와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독재 운동으로 나아갔다. 1951년 이승만 하야 경고문을 발표하였다가 부산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는 이시영(李始榮), 김성수(金性洙), 조병옥(趙炳玉) 등과 반독재 호헌 구국 선언을 발표하다가 정치 깡패들에 의해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벽돌을 맞아 피를 흘리는 모습이 해외 기자가 촬영한 사진으로 전한다.
1953년에 성균관대학교가 종합 대학으로 승격하면서 초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후 1956년에는 이승만 정권이 효창 공원의 7열사묘 앞의 연못을 메우고는 효창 운동장을 지은 후 열사의 묘를 이장하려 하자 반대 투쟁에 나섰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의 삼선 취임을 반대하여 경고문을 발표한 일로 성균관대학교 총장에서 물러나고 친일적인 유림 세력에 밀려 유도회(儒道會)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이 무렵 김창숙은 회고록으로 『벽옹 73년 회상기』를 집필하였다.
1958년에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나라에 대한 걱정은 그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의 국가 보안법 개악(改惡) 반대 투쟁에, 1959년에는 반독재 민권 쟁취 구국 운동에 나섰다. 이어 1960년에는 김구(金九), 이준(李儁), 안중근(安重根)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백범 김구 선생 시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궁핍한 삶]
김창숙 가문의 재산은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사용되느라 많이 사라졌고, 독립운동으로 가정을 돌아보지 않았기에 가족들은 매우 궁핍하게 지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오직 민족 통합에 대해 골몰하였기에 둘째 며느리가 친정에서 빌려 오거나 품삯을 해서 가정 경제를 꾸려나갔다. 해방 후 성균관대 학장과 총장을 여러 해 역임하였으나 여전히 곤궁한 생활 속에서 여관과 병원을 옮겨 다니고 셋집에서 여생을 보내었다. 이러한 김창숙은 문과로 진학하려는 손자에게 공대로 갈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대의를 위해 희생한 삶이 막을 내리다]
가난과 병환으로 고생하던 김창숙은 1962년 5월 10일 9시 45분경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랜 병석에도 항상 나라와 유림을 걱정하였고, 자신의 안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망하기 전 3월 1일에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동대문 운동장에서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후 5월 18일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리 산 127-4 묘지에 안장되었다. 당시 김창숙과 대립한 유림의 반대가 있어 제대로 된 장례 의식을 갖추지 못하였다. 서거 50주년 되던 2013년 제2회 성주 생명 문화 축제 때 김창숙의 전통 유림장이 재현되었다.
[사상]
일제와 이승만 정권에 대한 김창숙의 항거는 선비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명문가의 종손이면서도 가문과 가족을 돌보지 않은 채 철저하게 항일(抗日)의 삶을 살았다. 해방된 후에는 정치 권력이 독점되고 부패해지자 고령의 병든 몸으로도 반독재 투쟁으로 나아갔다. 이와 같은 투철한 저항적 삶은 대의에 입각한 의리 사상이 견고하지 않으면 실천하기 어렵다.
유가(儒家)로서의 김창숙의 면모는 상해 임시 정부 시절에도 유교에 입각한 군정학교 운영을 추진하고 중국 고전에 대한 높은 지식과 필담(筆談)으로 쑨원[孫文] 등 중국 국민당 지도자들과의 친교를 돈독히 함으로써 우리 청년 학생들에 대한 지원과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한 협력을 끌어내곤 한 데서 확인된다.
김창숙의 사상적 입장은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문하의 이승희, 곽종석 등에게서 수학하였으므로 이일원론(理一元論)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이일원론은 서세동점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불변하는 이치에 대한 믿음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기본적으로 이상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하므로 관념적 성격을 지니게 되기 쉬운데, 이들 한주학파의 이승희·곽종석 등은 관념으로 빠지지 않고 문명개화(文明開化)로 가장한 일제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김창숙은 가장 실천적으로 대응하여 행동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선양 및 추모 사업과 문화 콘텐츠]
출생지인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504번지에는 심산 김창숙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생가에는 최근 2016년까지 둘째 며느리 손응교 여사가 거주하다가 사망한 후 지금은 비어 있다. 손응교 여사는 시아버지인 김창숙의 권고로 담배를 피웠고 평생 동반자 노릇을 했으니 김창숙의 섬세한 감성이 엿보인다. 그러한 김창숙이 가족의 고난과 불행을 대했을 때의 심사가 어떠했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생가가 있는 칠봉리의 옛 지명은 사도실로서 산으로 둘러싸인 의성 김씨 집성촌이다. 경상북도 기념물인 생가는 안채, 사랑채, 판각고로 이뤄져 있다. 생가 근처에는 2022년 완공을 목표로 성주군이 추진하는 심산 문화 테마파크 조성이 추진 중이다. 성주군은 매년 생명 문화 축제 때 김창숙에 대한 숭모작헌례(崇慕酌獻禮)를 시행하고 있다. 생가 가까이에는 청천서당도 있다. 청천서당은 김우옹 사후 1729년(영조 5)에 청천서원이 세워졌고 후에 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아버지 김호림 때 서당으로 개수(改修)되었다.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생가에서 6㎞ 정도 떨어진 성주군청 옆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에는 심산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심산 기념관은 1974년 문중이 중심이 되어 건립되었는데, 현재는 성주군이 관리하고 있다. 심산 기념관의 편액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친필로서 기념관에는 심산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선조의 문집과 사진 자료 몇 점이 비치되어 있다. 김창숙의 유품 대부분은 독립 기념관에, 일부는 서울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앞뜰에 심산 김창숙 선생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서울 기념관은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데 ‘심산 김창숙 기념관[심산 기념 문화 센터]’이라는 이름으로 2011년 서초구에 의해 건립되었다.
김창숙의 『심산유고(心山遺稿)』는 손자 김위의 주도로 1976년에 국역되었다. 이 주손(胄孫)의 퇴직금이 토대가 되어 1978년 심산사상연구회가 발족되고 심산상도 매년 시상되고 있다. 최근에는 심산김창숙연구회로 개칭되었다.
김창숙의 삶을 조명하고 업적을 기리는 다큐멘터리도 여러 차례 방영되었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2021년 8월 11일 교육 방송에서 8.15 광복절 특집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라는 주제 아래 「조선의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을 방영하기도 하였다. 심산김창숙기념사업회에서는 매년 추모 제례를 묘역에서 봉향(奉享)하고 있다.
그 외 김창숙이 대구교도소에서 변호를 사절할 때 한 말이 심산 김창숙 기념관 홀의 벽면과 천안 독립 기념관의 어록비에 소개되어 있다. 김창숙과 며느리 손응교 여사의 삶을 함께 다룬 연극과 창극도 지역의 연극인들에 의해 창작, 공연되었다. 2009년에는 연극 「앉은뱅이 되어서야 옥문 나서니」, 2019년에는 창극 「심산 김창숙」이 공연되었고, 2020년에는 창극 「심산 김창숙」이 창작 뮤지컬로 재창작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