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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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湖山錄 |
분야 |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조선 후기 한경춘(韓慶春), 한여현(韓汝賢) 부자가 편찬한 충청남도 서산의 사찬 읍지.
[개설]
기본 체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따르고 있지만, 목차는 세분되어 있으며 내용이 훨씬 상세하고 여기에 지역과 지역민의 사정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조선 전기부터 1500년대까지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는데 충청도에서 발간된 조선 전기의 지역 자료가 극히 드문 실정에 『호산록(湖山錄)』은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총 45항목의 다양한 주제에는 서산의 지리적 특징, 문화재,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 임진왜란, 민속 등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특히 인물에 관한 기록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어 서산에 부임한 수령의 명단과 행적 그리고 서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체 분량의 반 정도를 차지한다.
인물 항목이 아닌 다른 주제에서도 관련 일화가 언급된 경우가 많은데, 이를 통해 조선 전기 서산 재지 사족의 입향과 혼인 관계, 활약상 등을 다방면으로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양반 사족뿐만 아니라 향리, 일반 양민, 천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신분층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호산록』을 통해 백성의 교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찬자의 의도가 담겨진 것이라 추측된다.
[편찬/간행 경위]
『호산록』은 1582년 서산에 수령으로 부임했던 고경명(高敬命)의 제안에 의해 재지 사족이었던 청주 한씨 한경춘, 한여현 부자가 편찬한 사찬 읍지이다. 이때는 몇 차례의 사화(士禍)를 거치면서 등장한 사림(士林) 세력이 도학(道學) 정치를 지방 통치에 구현하고자, 호구(戶口)·전결(田結)·군액(軍額)·공부(貢賦) 등의 파악을 위한 자료로 사찬 읍지 편찬을 주도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16세기에 전국적으로 등장하는 사찬 읍지의 대부분이 수령의 주도하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고, 당시 서산군수 고경명 역시 이와 같은 의도로 서산의 읍지를 구상하였던 듯하다. 그리고 서산의 유력한 재지사족인 한여현 부자에게 이 일을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호산록』의 첫머리에는 ‘호산록서(湖山錄序)’, ‘호산록목록(湖山錄目錄)’, ‘호산록의례고상(湖山錄依例考詳)’이라는 항목을 두어 『호산록』의 편찬 의도를 적고 있다. 37년간의 집필 기간으로 미루어 한경춘이 집필하던 것을 아들이 이어받아 마무리 지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한경춘은 큰일을 맡은 것에 대해 부담을 느낀 듯 겸손한 자세로 집필을 시작하였고, 자신의 가문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는 등의 예민한 문제는 고경명과 상의하여 처리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1619년(광해군 11) 한여현이 48세 되던 해에 비로소 『호산록』이 완성되었다.
[서지적 상황]
『호산록』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서산정씨족보(瑞山鄭氏族譜)』와 1927년에 편찬된 『서산군지』에 『호산록』이 계속 인용되고 있어, 이때만 해도 실존하고 있었던 듯하나 언젠가부터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을 찾기 위해 서산의 향토 사학자 이은우는 저자 한여현의 묘소와 후손을 찾아다니던 중 한여현의 12대 방계 후손의 집에서 우연히 오래된 고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은 필사본인데다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고, 원문을 알아보기 힘든 부분도 많으나, 이후 다른 본의 책이 발견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유일본으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92년 서산문화원에서 『호산록』의 원본과 번역본을 묶어 다시 발간하였다.
[구성/내용]
『호산록』은 『동국여지승람』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면서, 항목설정이 더욱 세분화되고 지역적인 면이 부각되었는데, 이는 목차구성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제1책 건(乾) 권에서는 “도리 원근(道里遠近), 건치 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성씨(姓氏), 향교(鄕校), 사묘(祠廟), 공자 세가(孔子世家), 묘사(廟祀), 성황사(城隍祠), 여제단(厲祭壇), 동서 리명(東西里名), 성곽(城郭), 관방(關防), 봉수(烽燧), 형세(形勢), 산천(山川), 토품(土品), 둔전(屯田), 국둔전(國屯田), 민속(民俗), 향풍(鄕風), 향서당(鄕序堂), 교량(橋梁), 장시(場市), 역원(驛院), 불우(佛宇), 누대(樓臺), 연당(蓮堂), 객관(客舘題詠), 제영(題詠), 유람(遊覽), 고적(古蹟), 해포(海浦), 해산(海産), 해호(海戶), 자염(煮鹽), 고금 토주(古今土主), 징병 격서(徵兵檄書), 임진년 행궁(壬辰年行宮), 유지(諭旨)” 등의 항목을, 제2책 곤(坤) 권에서는, “고금 인물(古今人物), 충신(忠臣), 효자(孝子), 절부(節婦), 우거(寓居), 운석(韻釋), 향소 청근(鄕所淸謹), 하리 청근(下吏淸謹)” 의 항목을 다루고 있다.
즉 제1책은 행정·사회·경제 등 다방면에 걸친 자료를 담고 있고, 제2책에는 오직 지역의 인물 관련 기록만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호산록목록’ 편에 소개되어 있으나 현전하는 원본에 훼손이 있어 운석과 향소 청근 일부가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호산록』이 사회·인물·예속 관계에 비중이 두어진 것은 재지 사족의 입장이 크게 반영되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고금 토주 및 경제·재정 관계 항목에서는 향촌민의 생활과 어려움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당시 어지러운 향풍, 관리들의 부정, 국방의 허술함 등 16세기 서산 지방의 실상을 개탄하는 내용으로 매우 귀중한 사료가 되어 준다.
[의의와 평가]
『호산록』은 1500년대부터 1600년대 초반까지의 서산 지역의 사회상을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다. 당시 각 지역에서 사족들에 의하여 편찬되었던 사찬 읍지의 기본 성격을 지니며, 향촌민에 대한 교화, 고을의 수령에 대한 경계, 가문 현양, 양란 직후의 사회 질서 안정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가운데 다른 지역의 읍지를 그대로 따르는 것을 지양하였다.
충청도에서는 총 5종[『공산지』, 『홍산현지』, 『충원지』, 『홍양지』, 『호산록』]의 사찬 읍지가 알려져 있는데, 『호산록』을 제외한 4종은 모두 현전하지 않는다. 이 와 같은 서지적 가치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 지역 사회상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재지 사족의 성장 과정과 인식 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