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8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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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敬命 |
영어음역 | Go Gyeongmyeong |
이칭/별칭 | 이순(而順),제봉(霽峰),태헌(苔軒),충렬(忠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조선 전기 서산군수를 역임한 문신이자 의병장.
[개설]
고경명(高敬命)은 1582년(선조 15) 서산군수로 부임하여 목민관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서산에 왔던 수령 중 최고의 선정(善政) 수령으로, 서산 5현으로 추대되었다. 학문 발전과 후학 양성에 전력하고 『호산록(湖山錄)』 발행을 권유하는 등 서산의 사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가계]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증조부는 고자검(高自儉)이며, 할아버지는 형조좌랑 고운(高雲), 아버지는 대사간 고맹영(高孟英)이다. 어머니는 진사 서걸(徐傑)의 딸이다.
[활동 사항]
고경명[1533~1592]은 광주(光州) 압보촌(鴨保村)[현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출생으로, 1552년(명종 7) 진사시와 생원시에 동시 합격하였고, 1558년(명종 13) 식년시 문과에 갑과 1위로 장원급제하였다. 관직으로는 사간원의 정언 등을 거쳐 학문적으로 호당(湖堂)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사간원헌납이 된 뒤 사헌부지평, 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를 거쳐 교리(校理)가 되었다. 1563년(명종 18)에 인순왕후의 외숙인 이양(李樑)의 전횡을 논할 때 교리로서 참여하였다가 울산군수로 좌천된 후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재등용되었고 이어서 종계변무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2년(선조 15) 서산군수로 임명되었는데, 부임 기간은 1년에 불과했지만 목민관으로서 일대에서 명성을 얻었고 서산의 사족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고경명은 한경춘(韓慶春), 한여현(韓汝賢), 문성해(文成海), 유지립(柳之立) 등과 함께 20세 이하의 특출한 자제 30여 명을 뽑아 가르치는 등 서산 지역의 후학 양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열람하고 감명을 받은 경험으로 서산 지역의 읍지 발행을 독려하였으니, 이것이 한경춘·한여현 부자가 1619년에 간행한 사찬 읍지인 『호산록』이다.
1583년 한성부서윤·한산군수를 거쳐 예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4년 사복시첨정이 된 뒤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거쳐 순창군수로 재직 중 1588년 파직되었다. 1590년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서인이 실각하자 곧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산 사족들은 고경명이 쓴 「징병의 격서」에 동참하여 의병을 모아 전장에 나가기도 하였다. 당시 충청도의 의병이 대체로 중봉 조헌(趙憲)의 문인들에 의해 주도된 것과 달리, 서산의 사족들은 전 군수 고경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주목된다. 당시 고경명은 자신이 주축이 되어 규합한 6천 여 명의 의병들과 의주로 가던 중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아들 고인후(高因厚) 역시 당시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전사하였다.
[학문과 저술]
고경명의 저서로는 『제봉집(霽峰集)』이 남아 있으며 동일 책의 속집(續集)과 유집(遺集)도 전한다. 특히 자신의 고향 부근인 광주 무등산을 유람한 기행록인 「서석록(瑞石錄)」과 의병 모집을 위해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正氣錄)」 등이 있다.
[묘소]
고경명의 묘소는 화순의 흑토평(黑土坪)에 조성하였다가, 1609년(광해군 1) 3월에 장성부(長城府) 오동촌(梧桐村) 오좌원[현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603년(선조 36)에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1618년(광해군 10)에 영의정으로 가증되었다. 1628년(인조 6) 인조는 충렬(忠烈)이라 시호를 내리고 광주에 사당을 세우게 하여 ‘포충(褒忠)’이라 사액하였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에도 제향되었으며, 서산에서는 고경명을 비롯한 서산의 다섯 인물을 기리기 위한 오현각이 1913년 부성산성 내에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