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4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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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湖芝面萬歲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지수걸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군 대호지면 천의장터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운동.
[개설]
일제 강점기 3·1 만세 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운동 가운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가장 격렬했던 시위는 1919년 4월 4일 정미면 천의리 천의장터에서 발생하였다. 당시의 천의 장날 시위는 치밀한 사전 준비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남상락(南相洛)은 고종의 인산(因山) 날 참례를 위해 상경하였다가 태극기 1점과 독립 선언서 1부를 얻어 귀향한 뒤 당시 대호지면 직원이었던 민재봉, 강태원, 송재만(宋在萬), 김동운, 남주원(南柱元) 등과 1차로 시위 계획을 협의하였다. 이후 시위 주체들은 최종적으로 면장 이인정(李寅正) 등 면 직원들과 협의하여 거사일을 4월 4일로 결정했다고 한다.
[경과]
거사일을 결정한 이후 사건의 주모자들은 연락망을 조직하고 면장의 명령으로 각 리장에게 ‘도로 수선(修繕) 병목(倂木) 정리의 건’을 하달하여 조직적으로 동네 주민을 동원하였다. 당시 사건의 주모자들은 선봉 행동대를 편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 선언서 및 애국가를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애국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백두산 정기가 한라에 솟았으니/ 한반도와 사해는 우리에 터전/ 반만년 역사와 삼천리 금수강산/ 빛나는 백의민족 만방에 자랑하도다.
2. 무궁화 동산을 하나님이 도우시니/ 태극기 물결이 세계로 벋어 가도다/ 2천만 동포여 피로 뭉쳐서/ 억만년 내 나라 가꾸어 가세.
사건의 주모자들은 1919년 4월 4일 오전 9시경 조금리에 소재한 대호지면사무소 앞에서 600여 명의 주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면장의 주도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 독립 만세’를 제창하면서 정미면 소재지까지 시가 행진을 계속하였다. 일본 경찰과 충돌하게 되자 격앙된 군중들은 일제의 천의 주재소를 파괴하고, 일본인 상가를 습격하여 엽총 1정과 권총 1정을 탈취·폭행하고 정식으로 해산 집회를 가진 뒤 대오를 해산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오후 무렵이었다. 당일 천의면사무소 앞에서 경찰의 발포로 주민 1명이 사망하였는데, 사망자는 대호지면 송전리의 마을 주민인 정천 이씨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송전리에는 정천 이씨가 50명가량 거주하고 있었는데, 300여 명의 송전리 주민들은 주민 살해에 항의하여 당일 오후 6시경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당시 시위 진압은 서산과 당진에서 차출된 경관 8명과 홍성 수비대 헌병 5명이 담당하였다.
일제 측 자료에 의하면 천의장터에 모인 시위 군중 수는 대략 800명이었으며, 체포된 시위자의 수는 21명이었다. 천의장터 시위 사건의 주도자는 대부분 대호지면 의령 남씨와 송전리의 정천 이씨였다. 남상락이 시위에 사용한 자수 태극기는 2008년 8월 12일 문화재청의 ‘등록 문화재 제386호’로 지정되어 현재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결과]
대호지면 만세 사건 관련자 52명에 대한 1심 재판에서 송재만·고수식(高壽植)·한운석(韓雲錫) 등은 징역 5년, 이대하(李大夏)는 징역 4년 및 벌금, 남태우(南泰祐)·송무용(宋武容)은 징역 4년, 이인정은 징역 1년 6개월, 남주원·남상락 등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모두 불복 공소하였다. 재판 결과 송재만은 3년 10개월, 고수식과 한운석은 징역 1년, 이대하는 징역 8개월 등으로 형량이 낮아졌다.
[의의와 평가]
대호지면 만세 사건은 시위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많은 사상자와 검거자가 발생하였다. 특히 현직 면장과 면서기들이 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점과 대호지면 의령 남씨와 송전리의 정천 이씨 동족 마을 주민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점 등이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