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447 |
---|---|
한자 | 三一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지수걸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3월 16일 - 서산읍 천도교, 기독교인, 수천 명 군중 해미에서 시위 |
---|---|
발단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해미 남상철 주도 만세 시위 |
발단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대호지면 도이리 주민 남주원 주도하 만세 시위 |
발단 시기/일시 | 1919년 3월 24일 - 해미 공립 보통학교 졸업생 만세 시위 |
발단 시기/일시 | 1919년 3월 31일 - 팔봉면 횃불 만세 시위 |
발단 시기/일시 | 1919년 4월 4일 - 대호지면 이인정, 남주원 군중 1천 명과 시위 |
발단 시기/일시 | 1919년 4월 8일 - 성연면 이종옥, 남명숙 주동 성왕산 만세 시위 |
발단 시기/일시 | 1919년 4월 10일 - 운산면 이붕하 등 수평리, 용현리 주민과 보현산 산상 거화 투쟁 전개 |
발단 시기/일시 | 1919년 4월 10일 - 음암면 부장리 주민들 야밤 횃불 시위 |
발단 시기/일시 | 1919년 4월 10일 - 운산면 갈산리 주민 50명 횃불 시위 |
성격 | 만세 시위 운동 |
관련 인물/단체 | 남상철|남주원|이종헌|이종근|이인정|이종옥|남명숙|이붕하|이종린|이종만|이종일 |
[정의]
1919년 3월 1일부터 약 2개월 동안 충청남도 서산시를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운동.
[개설]
3·1 운동 당시 서산에서는 12개 면에서 독립 만세 시위운동이 발생하였다. 특히 4월 4일 서산 지역 천도교인들이 주도한 대호지면 만세 사건은 상당수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미국 대통령 윌슨이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이른바 ‘민족 자결 주의 원칙’을 표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 외교 독립운동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특히 무단 통치에 대한 저항감, 또는 고종 독살설로 말미암은 분노감 때문에 많은 민중들이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산 지역은 구한말 동학 농민 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으로서, 일제 강점기에도 천도교의 위세가 강력했기 때문에 시위가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경과]
3·1 운동 당시 서산 지역에서만 12건의 만세 시위 사건이 발생했다. 12건의 사건을 『한국독립운동사』에 의거하여 시기 순으로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1919년 3월 16일 해미에서 서산 지역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 각기 시일 예식과 예배를 끝내고 시가지를 행진하다가 수천 명의 군중이 호응하여 시가지를 누비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19일에는 해미에서 군중들이 남상철의 주도 아래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날 대호지면 도이리 주민 수백 명이 유지인 남주원의 주도하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1일 태안면 일대에 거주하는 천도교인, 기독교인이 운집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24일 해미공립보통학교 졸업생 환송회 때 졸업생들이 학교를 뛰쳐나와 해미 우시장 부근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31일 팔봉면 내의 각 부락에서 일제히 산에서 횃불을 들고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1일 안면도 고남리[최씨 200명이 거주하던 동족 마을]에서 이종헌, 이종근 등의 주도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4일 정미면에서 이인정, 남주원 등이 천의장터 장날을 틈타 군중 1천여 명을 이끌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8일 성연면에서 이종옥, 남명숙이 주동이 되어 성왕산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10일에는 운산면에서 이붕하 등이 수평리와 용현리 주민을 선동하여 보현산에서 산상 거화 투쟁을 전개하고 음암면 부장리[부다리 유씨 70여 명이 거주하는 동족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야밤에 횃불 시위를 전개하였다. 또한 같은 날 운산면 갈산리 주민 50명이 횃불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2명이 숨진 사건이 일어났다.
1919년 4월 초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산상 봉화 투쟁이 서산, 예산, 홍성 등 내포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당시 천도교 교단 측의 조직적인 지도 때문이었다. 당시의 신문 기사에 의하면 1910년대 말부터 왕성한 포교 활동을 펼친 결과 1920년대 초반 서산 지역의 천도교도 수는 무려 500~6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서산 지역의 경우도 천도교 신구파가 갈등하는 과정에서 교세가 많이 약화되었으나, 일제 강점기 내내 구파 신도는 150명, 신파 신도는 60~70명 선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서산 지역에 천도교 구파가 강력했던 것은 구파계 중심 인물인 이종린(李鍾麟), 이종일(李鍾一) 등이 이 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 천도교 종리원은 서산 지역의 지역 사회 운동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종만은 해방 직후 서산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이종일은 서산군의 제헌 국회 의원을 역임하였다.
[결과]
서산 지역에서 만세 시위가 격렬해지기 시작한 것은 4월 4일 정미면 천의장터에서 이인정, 남주원 등이 1천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만세 시위를 전개하고 나서부터였다. 4월 4일의 시위에 이어 4월 8일 정미면 수당리에서 큰 시위가 발생하였는데, 300명의 군중이 헌병·경찰·군인[경관 4명, 보병 2명]과 충돌하여 1명의 주민이 사망하였다. 대호지면 송전리에서는 헌병과 경찰이 군중들에게 실탄을 발사하여 2명이 사망하였으며, 대호지면 조금리에서도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피해가 커지자 서산 지역 농민들은 몽둥이와 짱돌로 무장한 뒤 시위를 전개하였다. 가령, 4월 10일에는 음암면 내에서 50여 명의 군중들이 몽둥이와 짱돌로 무장하고 헌병 경찰에 맞섰으나 무차별 사격으로 2명의 주민이 부상을 입었다. 당일 운산면 만세 시위[300여 명 참가] 때도 헌병 경찰은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1명의 주민을 살해하고 2명의 주민에게 중상을 입혔다.
당시 헌병 경찰의 보고 전문을 통해서 확인된 서산 지역의 시위 사건은, 정미면 천의리[4일], 정미면 수당리[8일], 대호지면 송전리[8일], 대호지면 조금리[8일], 음암면[10일], 운산면[10일] 등 6건이며, 위의 보고들에서 확인되는 사망자[5명]와 중상자[5명] 수는 모두 10명이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 이후 무단 통치에 시달려온 조선의 민중들은 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일부터 2개월여에 걸쳐 전개된 만세 시위운동은 질적인 면에서건 양적인 면에서건 우리나라 민족 운동사에 남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비록 독립은 달성되지 않았으나 3·1 운동의 정신은 상해임시정부 운동이나 만주 독립군 운동으로 계승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서산 지역의 3·1 운동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일제의 헌병 경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었으나, 이때의 운동 경험은 이후 서산 지역의 지역 사회 운동의 인적 물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서산 지역에서도 1920년대 일제의 문화 정치 공간에서 청년 운동, 농민 운동 등 다양한 대중 운동이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