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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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始采旌閭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장동 34-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수연 |
건립 시기/일시 | 1832년 - 명정을 받아 연기군 남면 봉암리에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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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24년 - 유시채의 7세손인 유형열(柳亨烈)과 유창열(柳彰烈) 등이 주도하여 연기군 남면 봉암리에서 현재 위치로 이건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94년 - 서산시의 지원을 받아 새롭게 건립 |
현 소재지 | 유시채 정려 - 충청남도 서산시 장동 34-4 |
성격 | 정려 |
양식 | 이익공 양식|겹처마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장동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유시채(柳始采)의 정려.
[개설]
유시채[1681~1751]의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문보(文甫), 호는 봉암처사(鳳岩處士)이다. 아버지는 유중배(柳重培)이며, 연기군 남면 봉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늘 좋은 음식으로 어버이를 섬겼으며, 1711년(숙종 37) 흉년으로 사람들이 추위와 허기에 지쳐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부모 공양에만 힘썼다.
1729년(영조 5) 모친상을 당하여서는 쇠약한 몸으로도 상례를 한결같이 하였다. 1731년(영조 7)부터 아버지가 병으로 인하여 8년이나 거동을 못하게 되었을 때에는 잠시도 부친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간호에 정성을 다하였다. 결국 1736년(영조 12) 부친상을 당하자 여막(廬幕)에서 3년간 미음으로 끼니를 이으며 시묘하였다. 이러한 유시채의 효성이 널리 알려져 인근 사람들이 서산시 장동 마을을 ‘효자촌’이라 불렀으며, 당시 현감이 유시채의 효행을 가상히 여겨 쌀과 고기를 보내 주었다고 한다.
[위치]
서산 시내에서 해미 방향으로 약 7㎞ 정도 가면 오남동 오산초등학교에 이르는데, 유시채 정려(柳始采旌閭)는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장동 소여촌마을 도로를 따라 약 200m 들어간 곳에 위치한다.
[변천]
유시채의 효행으로 연기현과 도내 유생 한경악(韓慶岳), 신상목(申相穆) 등이 충청관찰사에게 정려 포장을 청하자, 관찰사 박회수(朴晦壽)가 예조에 보고하여 1832년(순조 32) 마침내 정려 포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현감 유철조(柳喆祚)가 『연기읍지(燕岐邑誌)』에 기록하였고, 조두순(趙斗淳)이 시를 지어 칭송하였다 한다.
원래 유시채 정려는 유시채의 효행으로 1832년에 명정 받아 연기군 남면 봉암리에 건립되었다. 이후 유시채의 4세손인 유원진(柳源稹)이 서산시 해미로 이거하였고, 유원진의 아들 유기종(柳基宗)이 현재의 장동으로 입거하면서 서산 지역에 문화 유씨(文化柳氏)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이처럼 유시채의 후손들이 서산시에 세거하게 되자 유시채의 7세손인 유형열(柳亨烈)과 유창열(柳彰烈) 등이 주도하여 1924년에 연기에 있던 유시채 정려를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이건 후 건물이 퇴락하자 서산시의 지원을 받아 1994년에 새롭게 건립하였다.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팔각의 높은 주초석 위에 둥근기둥을 올렸으며, 4면을 홍살로 처리하였다.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이익공 양식의 건물이다.
[현황]
2011년 현재 유시채 정려의 내부에는 ‘효자학생유시채지려(孝子學生柳始采之閭)’라고 쓰인 명정 현판과 1994년에 세운 120x40㎝ 규모의 유시채 효행비(柳始采孝行碑)가 세워져 있다. 주변에는 낮은 철담을 둘렀고, 정려각 뒤편으로 소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