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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831
한자 柳泗
영어음역 Yu Sa
이칭/별칭 성부(聖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가사2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춘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99년연표보기 - 유사 생
활동 시기/일시 1619년연표보기 - 무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36년연표보기 - 병자호란 때 전투에 참가
몰년 시기/일시 1636년연표보기 - 유사 졸
추모 시기/일시 1679년연표보기 - 이등분무공신에 추증하고 부조지전을 내림
추모 시기/일시 1891년연표보기 - 병조참판으로 추증
출생지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가사2리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괴산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묘소|단소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가사리 산245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유사 사당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가사리 2구 지도보기
성격 무신
성별
본관 문화
대표 관직 괴산군수

[정의]

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문화. 자는 성부(聖夫). 태종 때 우의정을 지낸 충경공(忠景公) 유량(柳亮)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통정대부 유광록(柳光綠)이다. 부인은 밀양 박씨평양 조씨이다. 슬하에 유세욱(柳世郁), 유세흥(柳世興) 형제와 딸 하나를 두었다. 증손자는 유홍(柳泓)이다.

[활동 사항]

유사(柳泗)[1599~1636]는 20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훈련원주부를 거쳐 괴산군수로 재임 중이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감사 정세규(鄭世䂓)와 선봉에 나서서 청나라 군대를 맞아 싸웠다. 유사의 군대는 남한산성을 공격하던 청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그 후 다시 전투에 나섰다가 전사하였다.

유사가 죽기 직전 병사들의 주검을 보고 통분하여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죽음으로 임금을 섬긴다’라는 뜻의 ‘사군사(死君事)’라는 혈서를 쓰고 통곡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유사의 시신은 수습하지 못하고, 부하가 투구와 토시만을 간신히 챙겨 싸움터를 빠져나왔다. 유품을 수습한 그 부하가 말을 달려 도착한 곳이 지금의 서산시 부석면 가사리 갈밭 동무실로, 유사사당이 위치한 곳이다.

[묘소]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가사리 산245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유사가 죽자 임금은 문무백관을 보내 조문하게 하고 예장(禮葬)하였다. 1679년(숙종 5) 특별히 이등분무공신(二等奮武功臣)에 추증하고, 특전으로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내려 사당을 건립하도록 하였다. 그의 증손자인 유홍(柳泓)이 성균관장임(掌任)으로 있을 때 상소를 올려 1891년(고종 28)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유사의 사당에서는 기일인 음력 12월 26일에 제를 올리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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