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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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石重 |
영어음역 | Yun Seokjung |
이칭/별칭 | 석동(石童),노래 나그네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율목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충청남도 서산이 원적인 근현대 아동문학가.
[가계]
본관은 파평. 호는 석동(石童). 아버지는 사회운동가이자 노동운동가인 윤덕병[1885~1950]이고 어머니는 조덕희다. 부인은 박용실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원적은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율목리다.
[활동 사항]
윤석중(尹石重)[1911~2003]은 서울 중구 수표동에서 윤덕병과 조덕희의 여덟째 자녀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형제들도 일찍 죽어 외할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랐다. 그래서 이름도 돌처럼 무거워 ‘날아가지 말라’는 의미에서 석중(石重)으로 지었다고 한다. 외로운 환경 탓에 일찍 자아에 눈을 떴고, 유년 시절 풀지 못한 수많은 의문이 훗날 어린이를 위한 시를 짓고 문화 운동을 펼치는 자양분이 되었다. 윤석중은 1921년 열 살에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초등 교과서에 실린 일본 노래 「봄이 왔다[春が来た]」에서 모티프를 얻어 우리말로 된 시 「봄」을 썼다. 이 시가 『신소년』에 실려 일찍이 문학적 소질을 인정받았다. 1923년 심재영(沈在英)과 『꽃밭』이라는 등사판 잡지를 창간하였다. 심재영은 소설 「상록수」를 쓴 심훈(沈熏)의 조카이다.
1925년에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 『어린이』 잡지에 「오뚝이」가 입선되어 작품이 처음으로 활자화되었다. 같은 해 8월 동인회 기쁨사를 만들어 등사판 잡지 『기쁨』을 1년에 네 차례 출간하고, 『굴렁쇠』라는 회람 잡지도 만들어 동인들끼리 돌려 보았다. 『굴렁쇠』는 두꺼운 표지에 ‘회람 잡지 굴렁쇠’라 쓰고 회원들이 지은 동요와 글동무들에게 알릴 내용을 편지 형식으로 넣어서 편집하였다. 같은 해 11월부터 『어린이』의 부록인 『어린이 세상』을 맡아 꾸렸다. 그 인연으로 ‘개벽사’에 드나들게 되었고, 이때부터 방정환(方定煥) 등과 함께 일을 하였다. 이후 한층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났다. 윤석중은 여기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여 졸업이 며칠 안 남은 시점에서 5년 동안 다닌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 이듬해 짧게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1932년 7월 첫 창작 동요집인 『윤석중 동요집』을 출간하였다. 1933년 35편의 동시를 실은 최초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를 발간하고, 방정환을 대신하여 『어린이』 잡지의 주간이 되었다.
1935년에 황해도 사리원에 사는 박용실과 혼인을 하였다. 결혼식 주례는 독립운동가이자 훗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든 여운형(呂運亨)이 섰다. 1936년에는 조선일보사로 옮겨 어린이 잡지 『소년』의 편집을 맡았다. 국내 최초의 그림 잡지 『유년』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가 동경 상지대학 신문학과에서 수학한 후, 벨기에인 고라르 신부를 도와 우리말 잡지 『빛』을 발간하였다. 해방 이듬해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지인 『주간 소학생』을 창간하고 「어린이날 노래」를 지었다. 졸업식에서 불리는 「졸업식 노래」도 윤석중의 작품이다. 가사 중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라는 부분은 마음의 꽃다발을 생각하며 쓴 것인데, 이후 졸업식장에 그렇게 많은 꽃다발이 등장할 줄 몰랐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한편 윤석중은 1950년 6·25 전쟁 때 아버지와 새어머니, 이복동생을 모두 잃었다. 또다시 가족을 잃은 아픔을 겪은 그는 이듬해 윤석중 아동연구소를 차리고 두 차례에 걸쳐 어린이를 대상으로 ‘내가 겪은 이번 전쟁’이란 주제의 글을 모아서 책을 펴냈다. 어린이의 글을 통해 전쟁의 아픔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1954년에는 윤석중 아동연구소의 이름을 새싹회로 바꿔 새로 창립하고 합창단과 합주단, 글짓기 교실 등 어린이를 위한 여러 조직을 만들었다. 1957년에는 소파상을 제정하고 『새싹문학』을 창간하였다. 이 책은 2011년 현재 115호까지 발행되었다. 윤석중은 스스로를 ‘노래 나그네’라고 부르며 어린이를 위한 삶을 살다가 2003년 12월 9일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작품과 저술]
윤석중의 작품 활동과 저술, 그리고 관련 활동은 매우 방대하다. 일생동안 1,300여 편의 시를 썼고, 이 가운데 800여 편이 동요로 만들어져 불리었다. 전국 30여 학교의 교가를 짓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 「새신」, 「똑같아요」, 「옹달샘」, 「나란히」, 「기찻길 옆」, 「집 보는 아기」, 「어린이날 노래」, 「졸업식 노래」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봉헌자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8년 동양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언론 문학창작상]을 수상하였다. 윤석중은 수상 소감에서 “어린이는 나의 스승이다. 동심은 국경이 없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동물이나 목석하고도 자유자재로 정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마음.”이라는 말로 평생 품어 온 어린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또한 그의 업적을 기리는 윤석중 문학제가 해미읍성과, 서산 호수공원 일원에서 매년 개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