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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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尙瑩 |
영어공식명칭 | Baek Sanghyeong |
이칭/별칭 | 순보(純甫),오헌(傲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권 |
출생 시기/일시 | 1705년 1월 25일 - 백상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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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89년 11월 20일 - 백상형 사망 |
거주|이주지 | 면포정(面圃亭) - 경기도 시흥시 하중동 샛말 |
묘소|단소 | 백상형 묘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수원 |
대표 관직|경력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
[정의]
경기도 시흥시 하중동 샛말에 살았던 조선시대 문인.
[개설]
시흥시 하중동 샛말에 면포정(面圃亭)이란 정자를 짓고 살며 당시 안산의 남인(南人) 및 소북계(小北系) 사대부들과 사로사(四老社)라는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가계]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순보(純甫), 호는 오헌(傲軒). 백상형(白尙瑩)[1705~1789]의 할아버지는 호조참의(贈戶曹參議) 백검(白儉)이고, 아버지는 종4품 첨정[僉正, 증 호조참판]를 지낸 백시채(白時采)이며, 박세장(朴世章)의 사위이다. 아들은 1769년(영조 45) 문과에 급제한 백사민(白師敏)이다.
[활동 사항]
백상형은 『오헌집(傲軒集)』에 따르면 “경종때 종4품 첨정을 지내고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연루되어 정주(定州)로 유배된 아버지를 약관도 되기 전에 따라가 간호하고 귀양지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와 장사를 지내고 시묘살이를 한 효자였다. 일생 동안 경서 연구와 시가 짓기를 좋아했다. 청려장[櫚杖, 종려나무 지팡이] 짚을 나이에도 이름난 곳이나 경치 좋은 곳을 듣기만 하면 멀어도 수레를 타고 가서 보고는 기행문과 시를 남겼다. 백상형의 관직은 아들 백사민의 1762년(영조 38) 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생원·진사시의 합격자 명부]에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충무위부사용(行忠武衛副司勇)'이 보이고 이후 80세 넘게 장수하여 동지중추부사가 제수되었다.
서울에서 살았으나 해안가인 지금의 시흥시 하중동 샛말에 정착하였다. 이곳을 개척하여 면포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작은 연못 2개를 파서 물고기와 연꽃을 길렀다. 연못에는 작은 인공 섬을 만들어 바위를 세우고 주위에 갖가지 꽃을 가꾸고 즐기며 시를 남겼다. 백상형의 후학 조영경(趙榮慶)이 쓴 「오헌선생행장(傲軒先生行狀)」에서 “정종(正宗) 기유(己酉) 11월 20일 밤에 병을 만나지 않고, 연성(蓮城) 관곡(官谷)에서 생을 마치니 향년 85세다.”라고 하여 연성이 당시 안산군의 별호이고, 관곡이 지금의 시흥시 하중동 관곡지 주변을 이르던 지명이므로, 백상형이 하중동에서 여생을 보낸 것을 알 수 있다.
백상형은 당시 안산의 남인 및 소북계 사대부들과 사로사라는 시사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시와 문장이 뛰어난 당대 문인이나 서화가들로 특히 시·서·화로 유명했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을 비롯하여 의암(蟻庵) 조중보(趙重普)[1705~?], 석가재(夕可齋) 이태길(李泰吉)[1709~?]과 함께 안산의 4대 문장가로 알려졌다. 뒤에 포동 출신의 학산(鶴山) 엄경응(嚴慶膺)[1696~1784], 현재(弦齋) 최창헌(崔昌憲), 권요성(權堯性), 김춘용(金春容)이 추가되어 세칭 ‘안산팔문장(安山八文章)’이라 불렸다. 이들 중 엄경응은 포동에, 강세황은 조남동 방화마을에, 이태길은 백상형의 거처에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살았다. 사로사는 봄 3월 보름, 여름 5월 보름, 가을 9월 보름, 겨울 10월 보름 등 1년에 네 차례 회원들의 집을 순회하며 모임을 주최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오헌집』이 있다. 『오헌집』에는 각종 시를 엮고, 사로사 안산 8대 문장가의 휘(諱)·호(號)·자(字)·생년월일·본관(本貫)이 자세히 실려 있다. 또한 조영경이 찬(撰)한 백상형의 행장기(行狀記), 가훈(家訓) 등이 실려 있다.
1765년(영조 41)부터 1768년(영조 44)에 쓰여진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산거의 그윽한 정취를 만끽하며 여섯 수의 시를 지어 이웃에 있는 이태길에게 보내 창화를 구하다(鑿池種花多有山居幽趣仍仍成雜咏六首呈西隣李穉大(泰吉)求和).”라는 칠언율시를 통해서 백상형이 하중동 샛말에 정착해서 살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오헌집』은 가전되어 오는 것을 백상형의 6세손인 백남화(白南華)가 시흥시 향토사료실에 기증하여 보관하고 있다.
[묘소]
묘소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에 있었는데, 군부대 설치로 1980년대 화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