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574 |
---|---|
한자 | 權憘 |
영어공식명칭 | Kwon Hee |
이칭/별칭 | 권도령,서당생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병권 |
[정의]
경기도 시흥 지역이 속해 있던 옛 시흥군 군자면의 구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개설]
권희(權憘)[1900~1955]는 1919년 4월 7일 군자면 구 장터 만세운동을 모의하다 일제로부터 피체(被逮)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경기도 안산군 마유면 장상리 안두일[지금의 시흥시 장현동]에서 대대로 세거한 안동 권씨(安東權氏) 종손으로 아버지는 권준영(權俊榮)이며 장남으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권희는 안두일마을 안동 권씨의 종손이다. 할아버지 사랑방은 항상 도포 차림의 선비들이 찾아와 시조를 읊고 나라 빼앗긴 울분을 토해내던 곳이었다. 권희는 4살 때 『천자문』을 깨우치고, 『소학』과 『명심보감』을 읽었다. 8세 때 가정교육을 중시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집 별채에 가학서당을 열었다. 경기도 수원군 매곡면 어천리[지금의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에서 훈장을 하던 문중의 권연(權衍)에게 맡겨 『사략』, 『대학』, 『중용』, 『맹자』, 『고문진보(古文眞寶)』 및 한시와 부(賦)를 익히고 민족 교육을 받았다.
1919년 3월 권희의 집에서 친구인 장곡리 장순한(張淳翰)[장수산(張壽山)], 이종영(李鍾榮), 이종진(李鍾振), 이종형(李鍾亨), 이응수(李應洙)와 모여 서울에서 온 손님을 통해 들은 만세운동 이야기를 하고 만세운동을 모의하였다. 4월 6일 권희가 대표로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간의 학정에서 벗어나 독립하려 한다. 우리들은 이 기쁨에 대하여 내일 7일 이 마을 구 장터[지금의 서안산 나들목 부근]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려고 한다. 각 주민은 구한국(舊韓國) 국기 1기를 휴대하여 모이라.”는 ‘비밀통고(秘密通告)’인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였다.
거사 장소인 구 장터는 안산군의 대표적인 장시(場市)였던 석곡산대장(石谷山垈場)이다. 1896년(고종 33)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인해 정부의 친일적 행태에 항거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났던 곳이다. 작성한 비밀통고문은 각 동·리에서 차례로 회람하도록 그림으로 표시하고 장순한이 마을 구장(區長)의 조카 이종영의 집 앞에 놓아두고 주민들이 서로 돌려보게 하였다.
4월 6일 장순한 등과 사전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권희의 사상적 배후로 지목된 권연 또한 피체되어 일제로부터 태형과 불 인두 고문을 당하고 서당도 폐쇄되었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이종진이 실토하여 장순한과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5월 15일 경성지방법원 판사 가나카와 히로키치[金川廣吉]는 권희와 장순한에게 각각 징역 1년과 10월을 선고하였다. 항소하였으나 모두 기각되고 1920년 5월 20일 만기 출소하였다.
만세운동 이후에는 가세가 기울어 경성 지주 낭정호(浪定鎬)의 소작농이 되었다. 1932년 여민동락(與民同樂) 소작인회 대표를 맡아 소작료 고정세율을 받아내 10년간 변동이 없도록 되자 선의에 보답하는 ‘낭공정호 송덕비’ 건립을 추진하여 비문을 썼다.
[저술 및 작품]
1932년 다음과 같은 낭공정호 송덕비문(浪公定鎬頌德碑文)을 썼다. 낭공정호 송덕비는 원래 능곡동 삼거리에 있었으나 현재는 시흥시 능골길 26[능곡동 617] 영모재공원에 있다.
오직 우리 낭공만이 봄에 밭 갈고 가을에 거두시네/ 현세에 살아있는 부처님같이 도와주시고 두루 구휼해주시네/ 소작하는 영세민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시네/ 영원히 몸과 목숨을 보전하시기를 바라며 이 비문에 싣노
라/ 소화 7년 12월일
유아낭공(唯我浪公) 춘경추렴(春耕秋斂)
금세활불(今世活佛) 보급주휼(補給周恤)
소작세민(小作細民) 만구공송(萬口共頌)
영보구명(永保軀命) 재차명비(載此銘碑)
소화칠년십이월일(昭和七年十二月日)
[묘소]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국립서울현충원 108실 168호에 있다. 처음 경기도 시흥시 장현동 산89 안동 권씨 세장지(世葬之)에 있다가 시화지구 외곽 도로 토취장(土取場)에 편입되어 1993년 장현동 산72번지로 이장하였고, 2016년 6월 1일 지금의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6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시흥시에서는 2015년 3월 1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시흥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기념식과 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