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5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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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木川張氏 |
영어공식명칭 | Mokcheon Jang Clan |
영어음역 | Mokcheon Jang Clan |
영어공식명칭 | Mokcheon Ja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욱 |
입향지 | 목천장씨 입향지 - 전라남도 순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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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목천장씨 집성지 -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월등면 농선리|월등면 갈평리|월등면 신월리|서면 비월리|승주읍 평중리|승주읍 서평리|승주읍 서흥리|승주읍 송전리|승주읍 장기리 |
묘소|세장지 | 정충사 - 전라남도 순천시 저전동 |
묘소|세장지 | 장윤정려 -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서평리 |
성씨 시조 | 장빈 |
입향 시조 | 장자강 |
[정의]
장빈을 시조로 하고 장자강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순천시의 세거성씨.
[연원]
장씨의 원시조는 신라 하대 장보고의 부친인 장백익(張伯翼)이고, 도시조(都始祖)는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안동 3태사의 한 사람인 장정필(張貞弼)이라고 한다. 목천장씨의 시조는 고려 충렬왕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낸 장빈(張彬)이다. 장빈은 충렬왕 때 원나라의 반란군인 합단적(哈丹賊)이 침략하였을 때 전공을 세워 목천군(木川君)에 봉해졌고, 이를 계기로 장빈의 후손들이 목천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입향 경위]
목천장씨가 순천 지역에 들어오게 된 것은 16세기 초반 장빈의 9세손인 장자강(張自綱)[1461~1526]때부터였다. 목천장씨는 장자강의 증조부 때부터 본래 경상도 진주에 살았으나 장자강이 1501년(연산군 7) 목천장씨 문중에서 처음으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순천향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순천에 입향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장자강의 후손들이 순천 지역에 뿌리를 내려 세거하였다.
장자강은 순천향교에 부임하여 조위(曺偉)[1454~1503]와 함께 진솔회를 운영하여 순천 지역 성리학의 정착과 활성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장자강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 덕분에 목천장씨는 순천의 명문가들과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대표적인 명문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장자강의 손자인 장윤(張潤)[1552~1593]의 활약은 목천장씨의 입지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고 할 수 있다. 장윤은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의 대표적인 의병장이 되어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목사의 직임을 맡아 전투를 지휘하다 장렬히 순절하였다. 이후에도 목천장씨 문중에서는 무과에 급제하여 입신한 인물들이 많았다.
[현황]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된 『조선의 성씨』[『朝鮮の姓』]의 순천군조에는 목천장씨가 전라남도 순천시 월등면의 농선리, 갈평리, 신월리, 쌍암면 평중리[현 승주읍 평중리] 등지에 139호가 사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1961년 순천향교에서 편찬한 『순천씨족보』에는 동성마을 이외에도 서면 비월리와 신기리, 해룡면 왕지리, 쌍암면 서평리, 서흥리, 송전리, 장기리 등지에 거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목천장씨는 2800명이 순천 지역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 유적]
순천시 저전동에는 장윤을 제향하기 위한 정충사(旌忠祠)가 있다. 조선시대 순천 지역에 있던 두 개의 사액서원 중 하나이며, 현재 전라남도 기념물 제232호이다. 정충사에는 각급 관청의 관료들이 쌀이나 소금 등을 증여한 내역을 기록한 『정충사 보부록』, 일종의 방명록인 『심사록』, 장윤에게 시호나 관직을 제수하는 각종 교지 등의 기록유물도 보관되어 있다.
순천시 승주읍 서평리에는 국왕이 내린 장윤의 정려(旌閭)와 신도비가 있다. 장윤정려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75호이다. 신도비는 1859년(철종 10) 황경원(黃景源)이 지었는데, 송준길이 비문을 썼고, 김상헌이 전서를 써서 건립하였다. 그리고 그 근처에 장윤의 네 아들인 장홍도, 장홍적, 장홍경, 장홍민이 우애를 돈독히 하고 부친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휴정(四休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