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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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世居姓氏 |
영어공식명칭 | Residing Family Name |
영어의미역 | Residing Family Name |
영어공식명칭 | Residing Family Name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욱 |
[정의]
전라남도 순천 지역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살아오고 있는 성씨.
[개설]
한국의 성씨 개념은 중국의 것을 빌렸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국은 성과 씨를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지만 원래 성과 씨는 다른 개념이었다. 성(姓)은 혈연으로 정해지는 것으로, 한국의 성씨 개념과 같은 것이다. 씨(氏)는 지연(地緣)으로 정해지는 것으로, 어느 지역 출신인가를 의미했다. 따라서 원래 개념의 씨는 본관과 같은 개념이다. 한국의 경우 성씨가 먼저 생겼고, 나중에 본관제가 출현하였다. 성씨의 연원은 고조선시대로 올라가지만, 거의 모든 지방의 지배세력들도 성씨를 갖게 된 것은 고려를 건국한 이후부터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940년(태조 23)을 전후하여 전국의 군현을 개편하고, 각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토성(土姓)을 분정 하였다. 성과 함께 세거 지역을 표시하는 본관제가 도입되었다. 지배층에 국한되었던 성씨는 성종[982~997] 이후에는 지방 군·현의 양민 층에까지 확대되었다. 하지만 조선 전기까지는 일반 군현뿐 아니라, 폐현(廢縣)·촌(村)·향(鄕)·소(所)·부곡(部曲) 등 거주하는 행정구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널리 남아있었다. 이와 함께 여말선초의 혼란기에 본관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이들이 확산되면서, 거주 지역과 본관이 일치하지 않는 사례가 빈번하게 나타났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대폭적인 인구 이동과 신분 변동이 일어났다. 또한, 고려시대 이래 향권을 장악했던 토착 본관의 성씨들이 지역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이주해온 성씨들이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본관과 성씨가 지방 세력을 알려주는 표식이 되는 시기가 지난 것이다. 이를 반영하여 저명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한 본관을 가진 성씨들은 같은 성씨의 저명한 본관으로 통합되는 현상이 널리 나타났다.
본관이 통합되는 현상과 함께 지역의 사족들은 지역의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자신들의 근거지를 기반으로 집성촌을 형성함으로써 세력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본관과 성씨만으로 지배 신분을 구분할 수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같은 본관의 성씨라고 하더라도, 어느 지역에 세거하는 집안인가에 따라 그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로 변화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성씨들이 종가를 중심으로 세거하게 되고, 본관보다 거주지를 통해 혈연적인 측면과 정체성을 내보이는 사회로 변화하였다.
[변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순천 지역의 토착 성씨가 망라되어 있다. 순천부에는 순천을 본관으로 하는 토성으로 장(張)·박(朴)·김(金)·강(康)씨가 있었다. 토성이었던 도(陶)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본관을 제정할 당시에 없었던 성씨가 둘이었는데, 풍산임씨(豊山林氏)는 내접성(來接姓)[다른 지방에서 이주하여 온 성씨], 이씨는 속성(續姓)[이전의 문서에 빠진 것을 뒤에 다시 적어 넣은 성]이었다. 이외에도 속현이었던 여수에 박(朴)·신(辛)·백(白), 부유(富有)에 현(玄)·김(金)·심(沈)·이(李), 돌산에 정(鄭)·윤(尹)·정(丁)·석(石)·노(盧) 등의 토성이 있었다. 이외에도 향인 삼일포(三日浦)의 박(朴)·전(田), 소였던 상이사, 가음 등을 비롯한 부곡에도 모두 각각의 토성이 있었다.
이들 성씨 중 조선 전기까지 순천 지역의 향권을 장악하고 있던 성씨는 토착 성씨인 순천김씨와 순천박씨와 함께 일찍 순천 지역으로 이거 한 순흥안씨, 청송심씨, 청주한씨, 남원양씨, 옥천조씨, 선산류씨, 장흥임씨 등이었다. 특히 순천김씨와 순천박씨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중앙의 명문 벌족으로 성장하였으나, 순천 지역에 잔류하고 있던 씨족과 인적 유대와 교류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순천 지역 사회를 주도하는 성씨가 교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기존의 토착 세력들이 밀려나고 조선 초기부터 임진왜란을 전후해 순천 지역으로 이거 해온 성씨들이 주도권을 장악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 초에 일찍 순천 지역에 정착했던 옥천조씨를 비롯해 양천허씨, 고령신씨, 경주정씨, 목천장씨, 상주박씨, 연일정씨, 양성이씨, 광산이씨, 성주배씨, 연안이씨 등이 16세기 중반 이후 순천 지역에 입향하였다. 이들은 김굉필(金宏弼)[1454~1504]의 유배를 기화로 순천 지역의 성리학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아울러 상호 간에 통혼권을 형성함으로써 재향 세력으로서의 기반을 다져가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위상은 임진왜란 이후 더욱 확고해졌다. 이들 성씨는 임진왜란 당시 다수의 의병장을 배출함으로써, 임진왜란 이후 전쟁 피해를 복구하고 향촌 질서를 회복하는 데 주도권을 가졌고, 결국 순천 지역의 향권을 장악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에는 제주양씨가 순천도호부 용두면 사포촌으로 이거 하였는데, 양팽손(梁彭孫)[1488~1545]의 후손이라는 후광과 무과를 거쳐 병자호란 때 의병을 기의(起義)했다는 것으로 쉽게 순천 지역 사족들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순천 지역에서는 흔히 옥천조씨, 경주정씨, 양천허씨, 목천장씨, 상주박씨, 남원양씨, 광산이씨, 양성이씨를 7성 8문으로 통칭하면서, 조선 후기 순천 지역의 저성으로 인정하고 있다.
[현황]
2015년 현재 전라남도 순천시 인구를 성씨별로 보면 김해김씨가 가장 많고 이어 밀양박씨, 전주이씨, 경주김씨, 광산김씨, 옥천조씨, 경주정씨, 진주강씨, 경주이씨, 전주최씨, 달성서씨, 인동장씨, 청주한씨, 고령신씨, 남평문씨, 파평윤씨, 목천장씨, 제주양씨, 경주최씨, 장수황씨, 상주박씨, 이천서씨의 순서로 되어 있다.
인구분포와 함께 1961년 『순천씨족보』를 간행할 때 유사 수를 보면, 성씨의 인구분포와 다름을 알 수 있다. 가장 많은 9인의 유사를 배출한 성씨는 옥천정씨와 경주정씨이다. 상주박씨가 7인, 제주양씨·목천장씨·김해김씨·고령신씨가 6인, 양천허씨·경주김씨가 4인, 장흥임씨·연안이씨·영일정씨·밀양박씨·영광정씨가 3인이었다. 광산이씨·의령남씨·양성이씨·고성김씨·대구서씨·동복오씨·성주배씨가 2인을 배출하였다. 강릉유씨·김해허씨·인동장씨·여양진씨·남원양씨·경주이씨·초계최씨·김녕김씨 등도 유사를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