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602
한자 鄭沼
영어공식명칭 Jeong So
영어음역 Jeong So
영어공식명칭 Jeong So
이칭/별칭 중함(仲函),청사(靑莎)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8년연표보기 - 정소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40년 - 정소 식년 진사과 입격
몰년 시기/일시 1572년연표보기 - 정소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12년 - 정소 청사서원 배향
출생지 정소 출생지 - 전라남도 순천시
사당|배향지 청사서원[현 곡수서원] - 전라남도 순천시 순광로 105-17[조례동 355]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연일

[정의]

조선 전기 순천 출신의 학자이자 연일정씨 순천 입향조.

[가계]

정소(鄭沼)[1518~1572]의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중함(仲函), 호는 청사(靑莎)이다.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정유침(鄭惟沈)[1493~1570]이다. 을사명현(乙巳名賢)인 정랑(正郞) 정자(鄭滋)[1515~1547]가 형이고,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은 막냇동생이다. 큰누이는 인종의 귀인(貴人)이며, 둘째 누이는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1502~1545]의 부인이다.

[활동 사항]

정소는 1540년(중종 35) 식년 진사과에 입격하였고, 모재(慕齊) 김안국(金安國)[1478~1543]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아버지와 형 정자가 화를 당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순천 지역으로 낙향하였다. 처음에는 청사(靑莎)의 농막에서 지내며 순천 지역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임청대에서 배숙(裵璹)[1516~1589], 정사익(鄭思翊)[1542~1588], 허엄(許淹)[1538~1610] 등과 함께 학문을 탐구하여 세간에서 정소·배숙·정사익·허엄을 순천에 은거한 네 명의 처사라는 의미로 승평사은(昇平四隱)이라고 일컬었다. 만년에는 성내의 번잡함을 싫어하여 소라포(召羅浦) 달래도(達來島)로 거처를 옮기고 마늘을 심고 낚시하는 즐거움으로 살았다.

[학문과 저술]

『강남악부(江南樂府)』에는 소라포 달래도의 삶에 대한 정소의 말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섬 안에 밭을 갈고 마늘을 심었다. 새 줄기가 자라려고 하면 오징어가 스스로 와서 마늘 줄기에 걸리니, 모두 잡아서 구워 먹는다. 이런 까닭에 서울로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 섬에서 자연과 함께 사는 즐거움이 도시에서 인간들과 부대끼면 사는 삶보다 즐거움을 말한 것이다. 김안국은 정소의 행장을 썼고,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는 정소의 묘비에 “참으로 모범이 될 만하다.”라고 썼다.

[상훈과 추모]

정소는 1712년(숙종 38) 형 정자, 지우(知友)인 조대성(趙大成)[1520~1566]과 함께 청사서원(菁莎書院)에 배향되었다. 청사서원은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58년 복설하면서 곡수서원(曲水書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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